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6. 여름의 끝 



 길었던 해가 기암의 절벽 사이로 숨어들었다. 봉산 아래 승산객들의 마을에서 발 없는 말은 어스름보다 빠르게 지천에 깔렸다. 저녁을 준비하던 아랫사람들에게 비국의 승산객 중 보도궁에 앉은 흑기린을 보고 마치 광인처럼 삿대질을 하며 웃는 자가 있었더라는 소식을 들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죄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그 모습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러게 누가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랬냐.”

 “이와쨩, 상처에 소금 뿌리는 말은 하지 말아 줘…”


  그 때 가장 놀랐던 사람은 나라고! 설마 그 꼬마쨩이 기린일거라고는 생각 못 했단 말이야…. 그리고 비웃은거 아니야! 들어줄 사람 없는 변명을 계속하던 오이카와가 별안간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나, 기세 좋게 기린의 간식을 전부 먹어치우고… 잠깐만… 그것들을 베었을 때 피를 묻히고 있지 않았었나?’


  그제서야 검은 머리 꼬마가 자신과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었던 이유를 알게 된 오이카와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비국의 새 기린 얼굴이 궁금하다고는 했지만 첫 만남이 이래서야 비국의 주후로서 면이 서질 않는다. 오이카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생각했다. 우선은 밥을 먹고,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보도궁에 진향한 다음 어찌할 지를 생각하자. 그래, 일단은 밥이다. 식사 준비가 어디까지 되었는지 물으려던 순간, 허둥지둥하는 손놀림으로 겉막이 걷혔다. 


 “오이카와 님, 밖에…!”

 “또 누구야…. 메이카쿠인가? 아니면 슈에이?”

 “봉, 봉산공께서… 비공께서 오셨습니다!”


  오이카와가 파드득 고개를 돌려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찾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서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잠시 기다려 줄 것을 청하라 부탁한 다음 부산히 몸가짐을 정리했다.


 “이와쨩, 나 머리… 머리 어쩌지?”

 “봉산공께선 네놈의 머리가 떨어져 있어도 개의치 않으실 게다!”


  어서 나와! 내실의 천막 앞에서 울리는 호령에 오이카와가 천막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표정의 여선의 곁에 얼마 전의 검은 머리 꼬마쨩, 아니 비국의 새로운 흑기린이 서 있었다. 동그란 눈이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감정이 쉬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예법으로 평복한 후 고개를 들어 기린을 맞이했다. 


 “비국 차주, 녹천에서 주후의 직을 맡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라 합니다. …낮에는 봉산공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기린의 곁에 서 있던 여선이 싸늘한 눈으로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겉모습은 십오륙 세의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봉산의 여선이면 세는 해가 의미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기린과 함께였을 터였다. 곧 오이카와를 향해 서릿발같은 질타가 떨어졌다. 


 “주후라 하여도 왕의 신하. 타이호는 그대와 같은 주후의 위를 받는 몸이지만 그건 비왕께서 즉위하신 다음의 일. 지금은 이 봉산의 주인이시니 후가 함부로 하실 분이 아닙니다.” 

“미츠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오이카와의 대답을 들은 미츠요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러남을 청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기린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한 여선이 자리를 떠나자 두 사람과 한 기린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천막 앞을 밝히기 위해 피워 놓은 횃불에서 간혹 불티가 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이와이즈미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봉산공을 밖에 계속 서 계시게 할 수는 없으니… 누추하지만 이쪽으로 오십시오. 천막을 들어 검은 기린을 들여보낸 이와이즈미가 슬금슬금 하인들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오이카와를 붙들었다. 


 “오이카와… 너도다! 도망가지 마.” 

“누가?!”


  흥, 하고는 오이카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탁자와 의자 대신 놓인 궤짝들 위에 가죽과 천을 깔아 기린을 앉히자 곧 다과가 들어왔다. 익숙한 향에 밤하늘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이어 소반에 놓인 과자를 권했다. 우유로 만든 흰 과자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따듯한 차와 함께 공기도 누그러들었다. 천막에 들어선 순간부터 말이 없던 기린이 차완을 내려놓고 오이카와를 향해 말을 건넸다. 


 “그때는 말없이 사라져서 놀라셨지요. 여선들의 눈을 피해 몰래 나왔던 거라 술시 전에는 들어가 봐야 해서….”

 “아…….” 

“그래서 보도궁에 진향하러 오신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비국의 관리라니!” 

“이쪽이야말로 그때 그 꼬마쨩이 기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아파, 이와쨩!”


  꼬마쨩이라니! 눈을 부릅뜨고 온 얼굴로 오이카와를 을러댄 이와이즈미가 기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놀라긴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밤의 황해를 앞마당처럼 훤히 다니는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소년은 절대 평범한 존재일 수가 없지. 쓴웃음을 짓는 오이카와의 옆에서 이와이즈미의 말이 계속되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비국의 희망을 만나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또, 저 모자란 놈을 이끌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저 길을 잃으신 듯 해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비국의 백연궁 금군 소속으로, 사인의 직을 받은 이와이즈미 하지메입니다.”


  이와이즈미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검은 기린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괜찮으니 어서 일어나시라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옛 전승의 한 장면처럼 완벽했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것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빼뚜름한 미소를 지은 입가에서 냉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 저녁에 봉산공께서 고작 일개 주후에게 사과를 하러 오실 리는 없고… 어째서 오신 겁니까?”


  혹시, 이 오이카와 토오루나 이와이즈미 장군에게 천계라도 있었습니까?


  훈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이와이즈미를 말리려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굳은 기린이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래진 밤하늘색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색이야 어쨌든 어차피 기린은 다…! 


 “쿠소카와…”


 고개를 숙인 채인 이와이즈미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를 꾹꾹 눌러낸 목소리를 들은 검은 기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이유가 없다면, 찾아오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기껏 날을 세워 대응했더니 힘이 빠진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새는 듯한 헛웃음이 나왔다. 이와이즈미는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기린의 단정한 얼굴에는 여전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스이세츠에게 가로막히신 다음 바로 밖으로 나가시기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겨우 진향이 끝나 여선을 졸라서 승산자들의 천막을 찾았습니다. 직위와 자를 알지 못하기에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려서…." 


 지금은 시간이 늦은 것 같으니 돌아가겠습니다. 교쿠야, 하고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부른 기린이 걸음을 옮겼다. 천막의 문 앞에서 검은 기린이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또 이유 없이 찾아와도 될까요?" 


  가능하면 늦지 않은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오이카와는 그 말에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내일 유시부터 추우 사냥을 위해 황해 주변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그 전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추우, 라는 말에 검은 기린의 표정이 일변했다. 밤하늘색 눈을 반짝이며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영락없이 그 나이 또래의 소년다운 모습이 된 기린이 주저하며 말했다. 


  "저, 혹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여선들에게 제대로 말씀하신 후 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검은 기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와이즈미가 의외라는 듯 꼭 한번 눈썹을 들썩거렸다. 오이카와는 웃음을 참아 가며 기다리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밤바람의 움직임을 닮은 머리카락이 장막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오랜 악우는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