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달리던 속도 그대로 모습을 바꾼 기린이 밤하늘에 뛰어들었다. 생김은 얼핏 사슴과도 같았으나 이마에 솟은 진주빛 일각의 뿔과 온 몸을 감싼 상서로운 기운이 사슴과는 확연히 달랐다. 윤기가 흐르는 밤하늘빛 갈기 아래의 검푸른 털가죽은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무지개빛이 어룽어룽했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와 탁 트이는 숨이 상쾌하도록 차갑다. 발 아래의 야영지에서 방금 전의 남자가 수풀을 뒤져 가며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기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꼬리 끝만이 밤바람처럼 살랑거렸다. 


 [비공.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붉은 눈동자 한 쌍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깜박였다. 피의 부정을 씻고 돌아오느라 인사가 늦은 사령의 이름은 사쿠후우. 천견이라 불리는 요마로, 날개가 달린 거대한 늑대 모양을 하고 있어 원숭이를 잡는 데에는 적임이었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사냥을 한 사쿠후우를 앞에 두고 기린은 수고한 사령의 공을 치하했다.


 “사쿠후우, 고마워.”

 [감사를 표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주인께서 명하신 일이니 따르는 것. 바람은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몸을 어둠 속에 숨길 수 있도록 눈 부분만 구현해 놓은 사쿠후우가 붉은 눈동자를 굴렸다. 


  [왜 저 자를 도우신 겁니까.] 

 “길을 잃었으니까.”

 […공께서 위험에 빠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많이 고픈 것 같았어.”

 

 저 사람이 내 만쥬를 다 먹었거든. 꽃차도. 빈 주머니를 떠올리자 배가 고프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미츠요가 걱정하겠지. 이미 별들이 말갛게 씻은 낯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제자리를 한바퀴 휘돌며 몸을 푼 검은 기린이 별들을 길잡이 삼아 날았다. 붉은 눈동자는 눈으로도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물 없는 바다의 이름을 가진 땅에도 밤이 찾아왔다. 



 남서쪽에서 다가오는 승산객의 행렬이 작은 점에서 큰 개미만큼 커졌을 무렵부터 리국의 주홍빛 기린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자련궁의 제 방에서 편히 쉬다가도 무시로 남서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햇살같이 빛나던 얼굴에 그늘이 깃드는 것을 본 여선들은 기린에게도 잘 들을 만한 약초며 향을 구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녔다. 좀처럼 침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동기의 방 앞을 서성거리던 소년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노천궁의 문턱을 넘었다.


 “저… 스가와라 님!”

 “응? 무슨 일이야?”

 

  산뜻한 대답에도 검은 기린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대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책과 서한이 담긴 두루마리를 정리하던 스가와라가 손을 멈추고 작은 동족을 향해 웃어보였다.


 “비공. 마음에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에는?”

 “바로 물어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라고 했을까요?”

 “배움에는 때가 없고 스승과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비공께서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 어린 태가 남은 검은 기린이 스가와라의 다정한 말에 아래를 향했던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천계는, 왕기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왕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왕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만약에 아주 무서운 사람이면 어떻게 합니까? 또, 안합일에 왕을 고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봉산 밖으로 쫒겨나게 됩니까? 고국…으로 내려가야 하는 겁니까?”


  왕도 없는데, 혼자서? …나라에서 받아 줄까요? 질문을 쏟아내는 내내 혼란이 가득 들어찬 눈망울이 데룩데룩 굴렀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방금까지 죽을상이었던 어린 기린의 얼굴이 이번에는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우선 오해가 있을 것 같으니 말해두는데, 왕기니 천계니 하는 게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꼭 어떤 기운이나 반짝임이나 색이나…여하튼 눈에 보이는 형태의 무언가는 아니야.”


  물론 어딘가의 바보 기린은 자기네 주상의 뒤에는 언제나 촛불 천 개 분의 후광과 꽃이 날아다닌다느니 하는 얼빠진 소리도 하긴 하지만…. 키득키득 웃던 은빛의 기린이 이어 말했다.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이 왕이 될 인물인지 알 수 있느냐. 그건…”

 “…그건요?”

 “…그냥 보면 알게 돼. 아, 이 사람이구나. 하고.”


  일종의 직감 같은 거지. …그렇게 표정 구기지 말고 들어 봐. 왕은 기린에게 선택받음으로써 왕의 자격을 얻지? 여기에서 기린의 선택이라는 건 하늘의 선택이라고 보아도 돼. 왜냐하면, 그게 천제께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이유니까.


 “기린이 선택했다는 것. 그게 바로 천계야.”


  그러니 비공과 리공은 자신감을 가지고 봉산의 주인으로서 승산하는 자들을 맞으면 돼. 설령 이번 안합일에 왕을 고르지 않았다고 해서 기린을 쫒아낼 만큼 배짱 있는 자가 이 봉산에 있을 리는 없으니 그것도 걱정거리는 아니지. 빙글빙글 웃으며 두루마리를 모아 보자기로 싼 대국의 은기린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 엔노시타는 성수가 되고도 스무 번의 안합일을 봉산에서 보냈어. 그때는 아직 얏쨩 님… 그러니까 인국의 왕이 태어나질 않았었거든. 그리고 충국의 츠키시마는 첫번째 안합일이 끝나자마자 “내 왕은 자기 발로 봉산을 찾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직접 왕을 찾기 위해 봉산을 떠났어.”


 …음, 그러니까 결론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 너무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가만히 생각에 빠진 검은 기린의 이마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은빛 기린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리공에게도 잘 전해 주도록 해. 다 괜찮을 거야, 라고.”

 “…네!”


  큰 소리로 인사하고 뛰어나가는 검은 기린의 볼이 발그레했다. 스가와라는 활기로 가득한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작은 동족에게 건넨 말은 사실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모든 것이 다 괜찮을’ 거라는 말이 모든 것이 전혀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과 같은 무게를 지닌 채 어깨에 얹혔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일 뿐이다. 천제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불리며 팔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기린이라고 해도 그 뜻을 감히 짐작할 수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팔을 들어 무거운 어깨 부근을 털어내듯 두어 번 쓸어낸 다음, 놓아두었던 나머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