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승산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차라리 시작점이 봉산의 입구라면 녹색 기암괴석이 만들어 놓은 미로를 따라 오르기만 하면 될 일이지만 영곤문에서 봉산의 입구까지 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에 문을 지난 승산객들은 길잡이를 따라, 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세를 이루어 요마와 요수가 들끓는 땅을 가로지르는 위험한 여행을 시작했다. 상급 길잡이를 앞세워도 꼬박 보름이 넘는 여정. 까딱하면 불귀의 객이 되기 딱 좋은 수풀과 늪지와 벌판과 바위틈 사이에서 


비서국 차주후 오이카와 토오루는 길을 잃었다.


  타고 있던 기수의 고삐를 언제부터 놓아버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요마의 습격이 있었다. 길잡이와 이와이즈미, 그리고 이와쨩의 수하 몇이 요마의 뒤를 쫒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무리가 오이카와의 일행을 쳤다. 남아있는 인원은 기록을 위한 문관과 짐꾼, 시종들 뿐이라 크게 전력에 도움이 될 만한 이는 없었다. 오이카와가 검을 들어 몇 마리 쯤을 베어넘겼지만 적이 너무 많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오이카와는 빠르게 명령했다. 


 “곧 이와이즈미 장군이 돌아온다. 버텨라. 싸울 줄 아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지켜 주어라. 내가 미끼가 되어 저것들을 따돌릴 테니.”

 “…오이카와 님, 안 됩니다!”

 “이래 봬도 나는 쉽게 죽는 몸이 아니야.”


  하지만 이러고 있다가는 너희가 다 죽지. 셋을 세면 오른쪽으로 뛰거라. 말을 마친 오이카와는 요마들 사이로 전력을 다해 기수를 몰았다. 한번 크게 휘저은 후 도망치는 오이카와의 뒤를 붉은 원숭이의 형상을 한 요마의 무리가 뒤따랐다. 


  그 후로 두 번의 낮과 밤이 지났다. 


  황해는 승산의 때 외에는 이와쨩과 추우를 잡으러 왔을 때 정도밖에 와보지 못했기에 오이카와는 부근의 지리를 잘 알지 못했다. 밤에는 별과 바람의 움직임으로 봉산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셈하며 쉬고, 요마가 움직이지 않는 낮동안에는 길을 찾으며 걸었다. 도망치면서 승산객 무리와 꽤 떨어졌는지 다른 대상의 무리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지선의 몸이어도 습관적으로 허기를 느끼는 척 하는 배를 쓸어 본 오이카와가 쓰게 웃었다. 이지경이 되었어도 약간의 곤란함 외에는 어떠한 불편도 없다. 피곤함도, 굶주림도 남의 일 같다. 하지만 일단은 사람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금 몹시 울고 싶었다. 


 “왜 또 나타나는 거야….”


  그 물음에 답하듯 붉은 털을 가진 거대한 원숭이 무리가 끼룩끼룩 울었다. 진짜 싫다… 난 원숭이가 싫어. 회전수가 느려진 머리가 멋대로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이 요마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점 더 오이카와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될대로 되라지. 오이카와는 기대어 있던 나무등걸에 아예 눕듯이 늘어져서 눈을 감아 버렸다. 자, 이제 저것들이 이 오이카와님의 몸을 아드득 깨무는 소리가 들려올 차례인데…?


  아드득 깨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오이카와의 몸은 멀쩡했다.


  스르르 샛눈을 뜬 오이카와의 시야에 거대한 붉은 몸체와 푸른 날개가 들어왔다. 호랑이보다도 큰 것 같은 몸체의 끝에는 노란빛의 꼬리가 빛나고 있었다. 요마의 피가 묻어 얼룩덜룩한 주둥이는 원래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을 터였다.


 ‘천견…?’


  오이카와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천견은 모여든 원숭이 요마를 하나의 남김도 없이 처리해 버리고는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주변이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숙면을 위해서는 요마의 피로 흥건히 젖은 장소에 있을 이유가 없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피냄새가 나지 않을만한 곳으로 이동해야지. 봐 두었던 길을 눈으로 짚어 가며 걷던 오이카와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요마냐?”

 “아닙니다.”

 “그럼…. 귀신이세요?”

 “…귀신이 뭡니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인가?”

 “…….”


  요마도, 귀신도, 사람도 아니야? 그럼 뭐지? 여전히 회전수가 돌아오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보던 오이카와는 뭐 어떠냐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행을 놓쳐버린 불쌍한 영혼이겠지. 오이카와는 마치 황해가 자기 집인듯 익숙하게, 하지만 오이카와의 속도에 맞추느라 힘겹게 걷고 있는 소년의 속도에 맞추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랑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표정을 한 소년은 오이카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몸에서 역한 냄새라도 나는 건가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검은 머리의 소년이 소매에 얼굴을 파묻은 채 킁킁거리고 있는 오이카와에게 제 주머니 속의 만쥬를 꺼내어 건네자 모든 고민을 잊었다. 그리고 그 주머니 속의 병에서 달콤한 향의 차가 흘러나온 순간 소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렴, 뭐든 어때. 


 “감로차구나. 청영(靑英) 54년, 백주산.”

 “네……네?”

 “이름도 모르고 마시고 있었어?”

 “집…에서 챙겨주는 대로 가지고 나와서.”


  리국의 아이인가 보다. 옷차림을 보면 리가의 아이는 아닌듯 한데. 비국의 지선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오이카와는 소년의 정체를 그쯤으로 정해 놓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산자락에 끄트머리가 걸렸다. 오이카와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쉬려고 했지만 소년은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숲쪽을 가리켰다. 


“밤의 숲은 위험하다니까. 로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그걸 꼬마쨩이 어떻게 아는데?”

 

 오이카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소년이 걸음을 뗐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나아가며 소년의 검은 뒤통수가 숲의 어둠에 녹아들었다. 오이카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화들짝 놀라 소년의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을 썩은 나무를 넘고 덩굴을 쳐내며 걷던 중, 오이카와의 귀에 무언가가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잡혔다. 멀리 불빛과 함께 하늘에 한 줄기 연기가 꾸물거리며 오르고 있었다. 


 “잠깐, 확인하고 올게… 꼬마쨩!”


  불빛을 보자 소년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덩굴을 넘고 얽히고 설킨 가지 사이를 바람처럼 뛰어넘었다. 오이카와는 행여 소년을 놓칠새라 덩달아 뛰었다. 거치적거리는 가지나 덩굴은 모두 베어버렸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숲 속의 나무들 사이의 너른 공간에 도착한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소꿉친구를 만났다. 


 “이와쨔아앙!!!” 

 “쿠소카와! 너! 뭐야! 지금! 어디 갔다가!” 

 “다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이와쨩이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오이카와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끌어모아 소년의 행방을 물었다. 


 “이와쨩, 나보다 먼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오지 않았어? 꼬마쨩은 어디 갔지?”

 “무슨 소리야. 길을 잃더니 머리도 같이 잃어버렸냐? 멧돼지처럼 숲의 나무를 죄 베어가며 달려온 녀석은 너 정도 뿐이다.”


  다른 일행에게 물어도 그런 소년은 본 적도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