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중일까지 무사하시길.”
색채가 없는 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져내렸다. 비국 어딘가 주, 향청의 대부라는 남자는 자국 기린의 말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예의를 다해 읍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곧 다음 승산자가 향을 올리기 위해 들어섰다. 개중에는 ‘타이호께서 마음이 바뀌실 수도 있으니까,’ 라며 몇 번이고 질리지도 않고 원점을 찍듯이 드나드는 자들도 있었다. 여선들은 곧 그들에게 별명을 붙인 다음 놀이삼아 진향 횟수를 세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방금 전의 대부는 비공에게 퇴짜를 맞을 때마다 아쉬운 듯 수염을 쓰다듬곤 해서 세이카로부터 ‘수염 대부’ 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쪼록, 중일까지 무사하시길.
“왕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당신은 내 왕이 아닙니다.”를 달리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라고 묻는 작은 동족을 마주한 엔노시타 치카라가 잠시 굳었다가 곧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을 띄우며 가르쳐 준 답안이었다.
“동지와 하지는 극일, 춘분과 추분은 중일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하지 무렵이니 다음에 문이 열리는 시기는 추분. 이 험한 황해에서 다음 동쪽의 영손문이 열리는 추분까지 건강하게 자신을 지켜 고국으로 돌아가시라는 인삿말이지요.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리가 중얼중얼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일까지 무사하시길, 중일…까지 무사, 하시길.” 이해되지 않을 거라면 외우는 것이 낫지요. 엔노시타 치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국의 검은 기린은 중일까지 무사하라는 말을 정오가 되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했다. 모처럼 여기까지 찾아와 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곧 바닥났다. 향을 올리고 고두한 다음 사람들은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지만 그 중에 기린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무료한 눈으로 토우세츠에게 줄 마노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기린의 귀에 잘 울리는 낮고 풍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국의 희망을 뵙게 되어 크나큰 광영입니다. 저는 흑주의 제후인 메이카쿠 슌페이라 합니다.”
검은 머리 붉은 눈의 남자가 깊이 고개를 숙여 왔다. 밤하늘빛의 시선이 남자의 강철빛 머리카락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오이카와 님 보다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수염 대부만큼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당당한 체구와 기품있는 자세로 눈을 빛내던 메이카쿠가 천 너머에서 탐색하듯 바라보는 기린을 향해 여유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에 밤하늘색 기린은 주머니에서 손을 떼었다. 이 자가 바로 오이카와 님과 이와이즈미님이 이야기하던 사람… 가만히 닫혀 있던 기린의 입이 열렸다.
“…중일까지 무사하시길.”
“그렇…습니까.”
봉산공께서도 강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메이카쿠는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도저히 가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에 기린이 눈을 빛냈다. 뭔가, 오이카와님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호기심 어린 시선과 여유있는 시선이 주렴 사이로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기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메이카쿠가 운을 띄웠다.
“봉산공께 감히 한 말씀 아뢰고자 합니다.”
“말씀하세요.”
“근래 차주후 오이카와 토오루와 가까이 지내신다 들었습니다.”
“…….”
“부디, 차주후를 너무 가까이 두지 않으시도록.”
대답 대신 검푸른 시선이 쏟아졌다. 메이카쿠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른 후 단숨에 말을 이었다.
“잘 벼린 칼은 쥔 사람의 손도 베는 법입니다.”
무언가 더 말할것처럼 시간을 끌던 메이카쿠는 그대로 읍하여 예를 갖춘 다음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여선들 사이에서 비국의 주후들은 어찌 하나같이 저렇게 무례하냐는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밤하늘빛 기린이 조용히 제 사령을 불렀다.
[스이세이.]
[부르셨습니까.]
차가운 물 같은 목소리가 기린의 몇 보 뒤에서 들려왔다. 기린은 메이카쿠가 퍽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듯 물었다.
[손을 베이지 않으려면 손잡이를 꼭 잡으면 되는 거 아닐까?]
[……글쎄요.]
스이세이는 힌만이니까 검에 대해서는 잘 알것 같아서 불러냈더니 몇번을 채근해도 영 시원치 않은 대답만을 반복했다. 비국의 기린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마노를 쥐었다. 손에 와닿는 차갑고 매끈매끈한 감촉에 토우세츠와 이와이즈미 님과 오이카와 님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흑주후가 남긴 말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물음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왜?
‘왜 오이카와 님과 가까이 지내면 안된다는 걸까?’
***
“제가 선왕의 핏줄이라 그렇습니다.”
선뜻 대답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가 눈을 가늘게 했다. 맞은편에 앉아 우유로 만든 과자를 갉아 먹던 기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대 비왕은 오이카와 님의 가족이었나요?”
“제 작은 누이였지요.”
“그런데 왜….”
선왕이라니, 지금은 왕이 아닌 걸까요. 라고 물으려던 기린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봉산공으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비국의 이전 왕과 기린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의 아픈 기억을 멋대로 들추다니. 잔뜩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인 검은 기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이 한없이 차갑게 타오르며 흔들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만이 그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오이카와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잘 펴지지도 않는 손가락들을 천천히 펴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기린이 실도의 병을 앓기 시작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청왕은 병든 기린을 벤 다음 …자결했습니다.”
“저, 죄송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게… 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이어보려는 검은 기린을 향해 오이카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 비국의 새로운 기린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더더욱. 대신 오이카와는 다른 화제를 내걸었다.
“그래서 메이카쿠는 봉산공께 저를 조심하라 말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제가 공의 마음을 얻어 왕이 된 다음 비국을 좌지우지하려 들거나, 최악의 경우…”
“오이카와!”
“제가 비공을 해치워 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기린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오이카와는 그 표정의 변화가 재미있다는 듯 웃어보였다. 하지만 동그란 상태 그대로 눈을 몇 번인가 깜박거리던 기린은 곧 오이카와를 향해 반문했다.
“죽이실 건가요?”
“…네?”
“제게 피를 뒤집어 씌우거나, 뿔을 묶거나 하실 건가요?”
“비공…?”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기린이 미소지었다.
“그럼, 저는 도망치겠습니다.”
“…네?”
“오이카와 님이나 이와이즈미님이 그러실 리는 없지만, 그러신다고 해도 도망치면 됩니다! 그러면 메이카쿠 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변한 기린을 추월할 수 있는 생물은 이 세계에 없으니까요. …그렇지요? 눈을 빛내며 일어나 금방이라도 모습을 바꾸어 달려나갈 기세인 기린을 이와이즈미와 함께 진정시킨 다음 도로 자리에 앉히면서, 오이카와 토오루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버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뒷면이 없는 웃음을 지은 것만 같았다.
'드림 > hq : 십이국기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0 (0) | 2018.04.01 |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19 (0) | 2017.08.08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17 (0) | 2017.07.15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16 (0) | 2017.07.12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15 (0) | 2017.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