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영곤문이 열린 지 보름 남짓이 지나 소서(小暑)가 가까운 어느 날, 보도궁을 향한 외길의 끄트머리에 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보도궁 앞의 너른 터와 미로같은 샛길을 따라 천과 나무로 지은 임시 막사와 기수가 묶인 기수사가 줄줄이 세워졌다. 모여든 무리에 따라 각 지방과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색색이 나부끼는 모양을 보니 황량하기까지 한 녹색의 기암이 가득했던 얼마 전의 모습이 꿈이었던 것만 같다. 머리 위를 휘도는 바람소리 외에는 소음이 없던 곳에 함성과 웃음, 욕설과 노래가 울려퍼졌다.
두 기린은 봉로궁을 오가는 여선들의 옷이 화사해지고, 그 화사한 모습으로 보도궁을 지키는 여선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정말로 왕을 찾을 날이 가까웠음을 알았다. 여느때보다 약간 이른 아침, 평시에는 어디에 있는지 거취를 알기 어려웠던 벽하현군 교쿠요가 두 봉산공을 찾아 왔다.
“간밤 평안하셨는가? 리공, 비공.”
“안녕하세요, 교쿠요 님.”
우아한 미소로 응대한 교쿠요가 바로 용건을 전했다.
“오늘부터는 이궁에 나와 승산하는 자들이 올리는 향을 받도록 하시오.”
영손문이 열리는 다음의 중일까지 가슴속에 하나의 뜻을 지니고 산을 오른 자들 중에서 다음 대 고국의 왕을 찾아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국왕 선정의 시기, 안합일이었다.
십수 명의 여선들에게 둘러싸인 두 기린이 봉로궁의 샛길을 지나 보도궁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너른 공간에는 분향의 제단이 두 개. 쌍둥이같은 제단 뒤에는 약간의 높이가 있는 단이 있었다. 벽을 제외한 세 면이 주렴과 늘어뜨린 천으로 장식되어 단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두 봉산공은 여선들의 시중을 받아 향로에 진향한 뒤에 단상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몸체보다 조금 큰 의자는 약간 어색했지만 과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양쪽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색색의 깃발과 천막이 가득한 활기 가득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밤 사이 만들어진 승산자들의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부터 보도궁의 건물 앞으로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두 기린은 어딘가 간절하면서도 기대에 차 있는 그들의 눈이 어쩐지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기린의 사위를 에워싼 여선들이 곧 눈치채고는 걷어놓았던 천을 내려 열기 가득한 시선을 막았다. 그제서야 두 기린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큰 숨을 내쉬었다.
“미츠요, …미츠요.”
“왜 그러세요, 비공.”
주렴 안쪽에서 움직거리던 기린이 속삭이듯 여선의 이름을 불렀다. 미츠요는 천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교쿠야를 불러도 될까?”
“히요우도!”
옆쪽 단에서 리의 목소리도 들렸다. 세이카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을 내려놓았을 때에만, 이라는 것을 지켜 주신다면요.”
두 기린은 각자의 여괴를 불러 곁에 앉힌 다음에야 완벽하게 안정을 되찾았다. 곧 문앞에 모여든 순서대로 사람들이 들어와 향을 올리기 시작했다.
“흑기린과 주기린이라니…! 비국과 리국의 경사로군!”
“두 분이 보도궁에 드시는 모습을 보았나?”
“그럼! 비국의 기린은 밤바람같이 검은 머리칼을 가졌다니까?”
“리국의 기린은 어떻고! 그 불타는 것 같은 색이라니…”
기린의 등장에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던 사람들이 지나치며 흘긋 본 것이 전부인 두 기린에 대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막을 뚫고 들어왔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요마를 베느라 무뎌진 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몇번인가 뼈를 치는 바람에 상한 부분이 눈에 띄어 속이 쓰렸다. 당장은 야장에게 맡길 수도 없는데. 승산한 자 중에 야장을 데리고 온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이대로는 추우를 잡기는 커녕 추우의 저녁 반찬이 되겠어. 섬세한 손놀림으로 칼에 스며든 핏내 섞인 기름을 닦는 데 집중하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지은 한껏 찌그러진 표정을 보지 못했다.
“…진향은 내일 하도록 하자.”
“왜? 얼른 해치워 버리고 추우 잡으러 가자더니?”
“잔말 말고 하잔대로 해.”
이와이즈미는 더는 말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쌓아놓은 짐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오이카와가 손을 멈추고 이와이즈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간에 미처 펴지지 않은 주름 두어 개가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말해 봐, 이와쨩.”
“뭘.”
“누굴 만났어?”
“아무도.”
“거짓말!”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너 찾으러 다니느라!”
…그건 미안하게 됐지만! 뭐라 할 말이 없게 오이카와의 입을 틀어막은 이와이즈미가 등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천막 밖이 시끄러워졌다.
“오이카와 가는 수치를 모르는 것이 내력인가!”
“…메이카쿠 님!”
“내가 하지 못할 말을 하는가! 청왕 세이가 망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오라비라니! 비서국을 무엇으로 아는 게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저거였군.’
오이카와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이와이즈미가 튕겨지듯 일어나 천막의 출입구 앞에 섰다.
“오이카와.”
“이와쨩,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맞이해야지.”
그리고 내친 김에 진향도 해 버리자. 지금 오이카와 씨는 우리 비국의 새 기린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아주 많이 궁금하거든. 깔끔한 동작으로 칼집에 검을 들여보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오이카와는 문을 막아선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천막의 가리개를 걷었다.
“안녕하십니까, 메이카쿠 공.”
매번 제가 보내는 청조를 쏘아 없애시던 분이 어쩐 일이신지. 차주 방향으로는 기침도 않으신다지요…? 평온한 얼굴로 웃음짓는 오이카와를 마주한 흑주후 메이카쿠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이카와 토오루!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기어온단 말이냐! 죄인의 몸으로 신성한 봉산에 오르다니!”
“자격이라…. 흑주후는 진정 내게 자격이 없다 여기는가?”
화사한 웃음에 온기가 사라졌다. 메이카쿠가 흠칫 놀라 말을 잃은 사이 오이카와가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며 말했다.
“나는 지금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비국에 새 왕조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누가 왕이 될 지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보아야지요.”
기세에 밀린 메이카쿠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보도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와이즈미가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진향한 이가 많아 보도궁 안은 상서로운 향기로 가득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의 내음을 한껏 들이킨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가 새로운 비국의 기린의 앞에 예의를 다해 향을 올린 후 고개를 들었다. 주렴 너머로 언뜻 보이는 밤하늘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단 아래 무릎꿇은 이를 알아본 검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너는……”
그 순간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선으로서 쌓아 온 모든 예의범절을 잊었다. 결례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주렴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손 끝을 지났다.
[물러나라.]
형체는 보이지 않아도 기세가 흉흉했다. 놀란 이와이즈미가 뒤에 와 서는 것을 느끼며 오이카와는 무심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요마도, 귀신도, 사람도 아니라더니.’
과연, 거짓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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