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봉로궁 여선들의 수장인 벽하현군 교쿠요가 탁자 위에 놓인 차완을 집어들었다. 비국 차주 명산 옥로차로, 얼마 남지 않은 최상급의 차였다. 비국에 왕이 없는 동안 폐허가 된 차밭에서는 상등품의 차가 나오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곧 기린기가 오를 테고, 비국과 리국에도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겠지. 현군은 그 대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 두 기린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스가와라 님, 엔노시타 님. 덕분에 리공과 비공께서 무사히 첫 안합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전변이나 전화, 사령의 다룸, 세상의 이치와 치국에 대한 식견 등이 빼어나게 좋아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비공은 요마의 절복에 재능이 있으시다구요… 현군의 말에 스가와라가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두 번째 수업에 나갔을 때 추우를 절복시키고 싶다고 말하기에 추우는 요수라서 절복시킬 수는 없고 사로잡아 길들여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실망을 하던지…. 그러고 나서는 닥치는 대로 절복을 시작하는데, 힌만과 천견, 큐키와 고유우까지 유시 전에 죄다 절복시키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들어 버리더라니까요?”

 “그것 참, 왠지 먼 옛날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차완을 들어올리며 느긋하게 흘리는 말에 스가와라가 뜨끔해서는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엔노시타가 궁금한 듯 현군을 돌아보았다. 


 “그 옛날 노천궁의 주인이었던 은빛의 기린이 있었지요. 걸핏하면 여선들의 눈을 피해 보도궁 밖으로 달아나서는, 황해의 가장 거친 길잡이도 무서워 슬슬 피하는 곳만 골라 다니며 닥치는대로 요마들을 절복해대기 시작했어요. 어찌나 날래고 빠른지 도저히 잡을 재간이 없었….”

 “교쿠요, …교쿠요 님…!” 

“왜 그러시나요, 다이키. 제가 그대를 쫒아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왕모님께 직을 거두어 달라는 청을 올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엔노시타는 현명한 기린이었기에 탁자 위의 실랑이를 못본 체 하며 가만히 차완을 기울였다. 세계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어 계절이 없는 봉로궁에도 서서히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해 입하 무렵 비국과 리국의 각 군현과 향, 이사에 왕의 선정(選定)을 알리는 기린기가 걸렸다. 봉산으로부터 승산을 허한다는 주작의 서신을 받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차주후 관저의 집무실 의자에 묻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새 기린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신을 들여다보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빠른 속도로 두루마리가 빠져나갔다. 잔뜩 가라앉은 눈을 하고는 멍하니 빈 손을 들여다보는 오이카와에게 서신을 훑어본 이와이즈미가 말했다. 


 “뭘 멍하니 얼을 빼고 있냐. 드디어 기린이 왕을 골라 온다니 좋은 일이잖아. 게다가 이번 기린은 현왕이 나올 징조라는 흑기린이라며.”

 “…색이야 어떻든.”


 기린은 다 똑같은 짐승일 뿐이다. 천계니 뭐니 하며 제멋대로 왕으로 삼고는, 인의와 자비가 가득한 얼굴로 갸륵한 척 행세하다가 결국에는 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불사(不死)에는 불망(不忘)이라는 저주가 딸려 있어서 오이카와는 선적에 오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 주변과 비국, 차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했다. 새털같이 많은 기억 중에서 세이를 잃은 날부터 시작된 지난 30여년이 가장 참혹했다.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행복했을까.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이와이즈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쿠니미가 알아본 바로는 적주후와 흑주후가 승산한다는 소식이다. 황주와 녹주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고. 백주의 영윤 슈에이가 짐을 꾸렸다는 얘기도 있어. 그리고 꽤 많은 눈이 …네가 승산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머리들이 없나? 선왕의 동씨에게는 천계가 내리지 않는다고!”

 “‘비국에는 머리 없는 자가 꽤 많다’고, 네가 그랬잖아.”


 돌덩이같은 얼굴로 농담을 던지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오이카와가 웃어보였다. 그래, 순 머리 없는 놈들 뿐이지. 어떻게 내가 왕이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와쨩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이든 간에 기린이 왕을 데려오기만 하면 곧바로 인수인계를 한 다음 선직을 반납할 참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지켜봐 주지. 내 동생의 목숨을 앗아간 그 자리에 누가 오르게 되는지!’


 “이와쨩, 승산 준비를.” 

 “…안 간다며?”

 “내가 승산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데, 기대에 부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어?”


  영곤문까지의 최단 거리 여정과, 황해를 지날 길잡이를 수소문해 줘. 솜씨가 좋은 사람으로. 그리고, 함께 가 줬으면 좋겠어. 웃으며 말하는 오이카와의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와이즈미가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응. 혹시 알아? 이와쨩이 기린의 선택을 받아 차기 비왕이 될지?”


 예전의 주왕도 녹주의 장군이었잖아. 뭐, 이와쨩을 왕으로 선택하는 기린이라면 그 수준을 알만하지만. 자는 바위 암 자를 써서 암왕, 어때? 아마도 안되겠지만! 그렇다면 이왕 황해에 간 김에 기수 사냥이라도 하든가. 괜찮네! 꽉 쥐었던 손을 털어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잘거리는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와이즈미가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나마 이 녀석을 걱정해 준 스스로가 바보같은 기분이 든다. 이와이즈미는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아예 큰 바위 라는 뜻으로 대암왕은 어때?”


  따위의 말을 내뱉는 건방진 차주후의 입을 가차없이 틀어막아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름 뒤의 첫 새벽. 차주후 오이카와 토오루와 비국의 대사마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조촐한 승산 행렬이 소리도 없이 차주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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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스가와라는 포켓몬 고를 잘 할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요마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