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번째 주제 : 상실

하이큐 오이카와 토오루,카게야마 토비오 드림


센티넬가이드AU

캐붕 및 날조 주의, 불편한 소재 주의(범죄관련)




"지금 뭐라고 했어요?"


서슬 퍼런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전일본이형능력체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을 거느린 채 오이카와와 대각으로 서 있던 CIAS 센다이 지부장, 야마모토 쿠니히로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쩡한 겉가죽이 자아내는 일견 무해해 보이는 미소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제법 잘 먹혀드는 무기였다.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는 상대다. 그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자, 자. 오이카와 군, 그렇게 화를 내지만 말고-"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죠. ...내 가이드를 어쩌겠다고?"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오이카와의 주변에 진홍빛 아지랑이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불꽃에 휩싸인 오이카와가 나른하게 웃음지었다. 홍차색 눈동자가 사르르 눈꺼풀에 덮여가는 모습을 맞은편의 야마모토와 연구원들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바라보았다. 아니, 실제로도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야마모토와 연구원 여섯 명을 죄어 놓은 오이카와가 한 걸음, 야마모토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막혀오는 압박에 여성 연구원 한 명이 이상한 신음을 내며 정신을 놓았다. 오이카와는 신기하다는 듯 몸을 기울여 야마모토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잊으셨나봐요, [아오바 구 센티넬 폭주 사건]."


내 가이드를 건드린 그 쓰레기 새끼를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야마모토의 눈을 들여다 볼 때의 데드마스크같은 무표정을 벗어던지고 어느 새 월간 배구에 종종 등장하는 훈남 배구 선수의 얼굴로 미소짓는 오이카와를 마주보며, 야마모토는 그가 센다이 센터로 첫 발령을 받은 해의 사건을 떠올렸다. 


***


수년 전, 아오바 구의 한 주택가 인근에서 폭주한 A급 센티넬 Y가 본능적으로 가이드 파장을 감지하고 한 소녀를 찾아냈다. 갑자기 하늘에서 뛰어내려와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소학생이었던 그녀는 성인 남성인데다 센티넬인 Y에게 제대로 된 반항 하나 하지 못하고 잡혔다. 도망가려던 자세 그대로 품에 안긴 소녀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댄 Y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제 막 가이드 발현이 시작되려던 소녀의 파장은 폭주한 A급 센티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 더, 깊은 접촉이 필요하다.' 폭주의 영향으로 사고회로의 작동이 멈춰버린 Y는 다급한 손길로 소녀를 감싼 천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접촉한 센티넬에게서 전해지는 충격과 자신이 마주하게 된 상황에 대한 공포로 얼어붙은 소녀는 모자란 숨을 토해내며 울먹였다. 어디에도 이 상황을 변화시킬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Y는 아오바 구의 한 쓰레기통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Y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환경미화업체의 직원으로, 쓰레기통을 가득 채운 옷가지에 짜증을 내며 꺼내놓으려다가 그것이 옷가지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신고했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과학수사대의 검시관과 감식반원들은 시체를 확인하자마자 CIAS에 협조를 요청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 하나 없는 Y의 모든 뼈가 3cm이하로 잘게 부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간 가지각색의 센티넬 범죄 희생자들의 시신을 보아 온 검시관도 고개를 저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사망추정시간이었는데, Y의 생체반응이 확실히 사망으로 돌아서기까지 시간이 유독 길었다는 것이었다. '심장에서 먼 부위부터, 하나씩 하나씩 분질러가면서 살폈을 겁니다. 정신을 놓은 것 같으면 깨워가면서,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센터 소속의 모든 센티넬을 대상으로 조사가 시작되려는 찰나, 막 학교가 끝나 하교하는 것 같은 차림새의 남녀 소학생 두 사람이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야마모토 쿠니히로가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의 가이드를 처음 만난 날의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Y를 살해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 센티넬 각성을 마쳤음을 알렸다. 의도가 명확하고 수단이 악랄하기 그지없으나 Y가 거듭된 폭주로 폐기예정인 센티넬이었다는 점과 오이카와가 형사미성년자인 점, 그리고 센티넬에 비해 현저히 수가 부족한 가이드를 지키려고 그랬다는 정상이 참작되어 오이카와에게는 센터에서의 유폐와 보호감찰 처분이 내려졌다. 그리고 오이카와와 함께 가이드 각성을 한 그녀 역시 센터에 등록되어 성년이 될 때까지 오이카와의 임시 가이드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성인 남성 센티넬에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였으나, 오이카와와 페어로 활동하며 많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 후로 5년 후, 4월. 그녀가 센터에 한 소년을 데리고 나타났다. 부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학교에서 센티넬 각성을 시작하기에 세이프가이딩을 하고 데려왔다는 소년의 이름은 카게야마 토비오. 얼마 후 열도 유일의 트리플 S 레벨, 측정불가의 타이틀을 얻게 될 센티넬이었다. CIAS로써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세이프 가이딩의 효과인지 그녀와 카게야마의 동조율은 99%에 달했다. 현재 그녀의 센티넬인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동조율인 83%도 높은 편이었지만 100%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동조율은 학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먹이감이었다. 완전히 카게야마의 전담으로 하겠다는 것은 무리다. 오이카와의 제 가이드에 대한 과보호와 집착은 이미 유명하니까. 다만 세 명을 한 페어로 묶어두겠다는 말에도 저렇게 도끼눈을 뜨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야마모토는 따끔거리는 목구멍에 애써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 1:1 대응관계로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건, 오이카와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그 더럽게 귀여운 후배님과 내 가이드를 공유해라?"

"가이드로 각성한 이상, 그녀에게도 의무는 주어집니다."


그리고 카게야마를 살려 데려온 것은 그녀이지요. 야마모토의 말에 오이카와의 불꽃이 꺼졌다. 연구원들과 야마모토를 죄던 압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이미 정신을 잃고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주저앉는 가운데 야마모토만이 겨우 서서 오이카와를 마주보았다. 수년 분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처럼 오이카와가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하... 깊은 한숨이 이어진 끝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었다. 


"가 볼게요. 저분들에겐,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야마모토는 대답 대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인 후 가볍게 비틀거리며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야마모토는 안심하고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