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번째 주제 : 희망고문 

하이큐 카게야마 토비오 드림

   

시리즈물 주의, AU(센티넬버스)주의, 주제이탈 주의

 

 

 

 

올해 최고의 이슈는 단연 카게야마 토비오의 트리플S급 타이틀 제패였다. 그녀가 카게야마를 이끌고 센터의 문을 열었던 그 순간부터 반년이 넘는 술래잡기 끝에 미국 센티넬 커멘드 센터의 인력까지 동원된 후에야 겨우 내려진 결론이었다. 공식적으로 SS급 이상의 센티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 규격 외 센티넬을 분류하기 위해서 전일본이형능력체 제2연구소, 통칭 2연의 거의 모든 연구원들이 매달리다시피 하며 카게야마의 한계치 측정을 위해 밤낮을 불살랐다. 처음엔 2연의 모든 것을 낮설어하고 중간에는 한계치 측정 기기와 엉뚱한 경쟁심리가 붙었던 카게야마는 연구원들 사이에서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에 이어 ‘몬스터2’ 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녀를 괴물들을 거느리는 ‘마녀’ 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이른 겨울, 열일곱 번째 한계치 측정 실험에서 처음으로 기계가 고장나지 않았음에도 측정을 멈추었다.

 

“...카게야마 군?”

 

기록 화면을 바라보던 수석 연구원 마츠이 유카가 의아하다는 듯 모니터 너머의 카게야마를 불렀다. 센티넬 에너지를 흡수, 분해시키는 특수 유리라지만 이미 카게야마의 손짓 한 번에 열여섯 번 쯤 박살이 났었다. 첫 번째 실험에서 기기 뿐 아니라 실험동 전체를 날려버릴 뻔한 카게야마는 두 번째 실험과 세 번째 실험을 지나면서 놀라운 속도로 날뛰는 에너지를 제어하는 법을 익히는 동시에, 효율적으로 한계치 측정기기를 망가뜨리는 법을 익혔다.

 

한 번은 빨리 끝내고 봄의 고교배구 예선전 대비를 위해 연습을 하러 가 봐야 한다며 구형의 측정기기에 손을 대자마자 강화유리를 녹여버리고는 그 녹인 강화유리로 배구공 모양을 만들어 놓고 멀뚱멀뚱 서 있기도 했었다. 실험동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마츠이를 비롯한 카게야마 전담팀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실례했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라고 꾸벅 인사를 건넨 후, 씩씩하게 밖으로 나갔다. 연구원들은 5중의 잠금장치와 충격 방지 처리가 된 실험동의 문을 여닫이문처럼 열고 나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를 잡고 웃었었다. 그러나 오늘의 카게야마는 무언가 달랐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구형의 측정기기에 손을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니터룸의 미국 측 관계자가 가만히 내뱉는 탄성이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마츠이가 다시 카게야마에게 질문했다.

 

“카게야마 군. ...최대로 개방해 볼까요?”

“저... 죄송합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구체에서 손을 뗀 카게야마가 움직임을 보이자, 모니터룸의 마이크가 점등되며 카랑카랑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Ms Matsui. 무슨 일이죠?]

[그가 측정을 거부했습니다.]

[센티넬을 설득해서 실험을 속개하도록 하세요. 이번에야말로 데이터가 나올 겁니다.]

 

모니터룸의 지시에 마츠이가 다시 실험동과 연결된 마이크를 켰다.

 

“카게야마 군, 괜찮나요?”

“그만... 하겠습니다.”

“카게야마 군.”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등급이 정해지면, 카게야마 군의 가이드가 정해질 겁니다. 아마도 카게야마군을 세이프가이딩 한 그 가이드가 매칭될 겁니다. 마츠이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에 카게야마가 반응했다. 순간 치솟는 수치에 모니터룸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에서 푸른 불길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선배는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 선배에게는, 오이카와 선배가...

 

카게야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마츠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 가이드는 현재 오이카와 토오루와 임시 페어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둘 다 미성년인 관계로, 아직 각인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더 강하고, 동조율이 높은 쪽과 페어를 구성할 수밖에 없겠지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마츠이의 목소리가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검푸른 눈동자에서 불이 쏟아졌다.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은 카게야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어 센터와 모니터룸이 연결된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게야마가 측정기기 쪽으로 손을 뻗은 것과 동시에 파괴음과 함께 카메라 연결이 끊어졌다. 지직거리는 화면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측정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실험동에 도착했을 때 이미 카게야마는 사라진 후였고, 카메라가 연결된 전면부에는 한때 한계치 측정 도구였던 덩어리가 깨끗하게 녹은 후 동그란 구 모양으로 만들어져서는 정확히 카메라 부분에 반쯤 박혀 있었다. 고교 배구부에서 세터를 맡고 있다더니. 나이스 토스로구만. 누군가의 한탄과 같은 한 마디에 주변의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일렁거린다. 눈 안의 불이 사라지지 않아 카게야마는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검푸른 불꽃을 풀무질했다.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수근대는 목소리. 힐긋거리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혐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흔한 적개심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폭주하기 시작한 파장을 억지로 잡아 끌어당기며 카게야마는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먼저 발걸음이 움직였다. 복도를 지나 몇 개인가의 건물을 통과해 두텁고, 어째서인지 물기가 있는 유리문을 열자

 

그녀가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날뛰던 파장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에는 있을 리 없는 여리고 부드러운 초록색 잎들. 나무와 꽃이 우거진 그늘 아래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가 놀란 듯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무슨 일이야.”

 

너, 파장이... 벌떡 일어나 카게야마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다짜고짜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선배, 그, 저기... 괜찮습니다! 이제... 고장난 테이프같이 중얼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늘 아래 의자까지 끌려 간 카게야마가 그대로 의자에 앉혀졌다. 그녀는 카게야마의 고개를 젖히고는 그대로 이마와 눈 사이에 손을 얹었다. 약간 서늘하고 건조한 손이 그저 닿았을 뿐인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불꽃을 풀무질하던 심장이 차분해지고 눈 안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금세 편안히 숨을 내쉬는 카게야마에게 그녀가 말했다.

 

“한계치 측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네.”

“그럼, 카게야마도 가이드 매칭을 하겠구나.”

“...네.”

 

다시 말이 없어진 그녀가 카게야마의 눈과 이마 사이에 있던 손가락을 불편한 듯이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센터의 대기실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 있던 오이카와 선배와 그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의 움직임에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살피는 느낌이 나더니, 이번에는 손이 이마 위로 올라왔다. 온실 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공조 시스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락거리며 잎사귀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카게야마의 입술 안쪽에서 소리가 되지 못하는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선배. 오늘 한계치 측정 기계를 또 망가뜨렸습니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한참 시끄럽게 말했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연에서는 선배와 저를 매칭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오이카와 선배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아무리 선배와 제가 동조율이 높다고 해도, 선배는... 오이카와 선배가 아니면 안 되니까... 제가 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래도... 선배.

 

“...한번만 제게 거짓말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흘러나온 말에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가락이 이마를 간질이던 검은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그 간질거리는 움직임에도 카게야마는 꽉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카게야마. 나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을 거야.”

 

그리고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우선, 지금은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고생 많았어, 카게야마.’

 

무심코 마음이 아파올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잠에 빠진 카게야마가 깨어날 때까지 잠시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