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8. 꿈마중
처음엔 햇빛에 반사된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바위틈에 몸을 기대는 파도는 종종 여러 색깔로 부서지곤 하니까. 하지만 술기운에 내려앉은 눈꺼풀을 여러번 밀어올려 봐도 빛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밝아지며 위 아래로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컴퓨터 그래픽 같으네.'
그녀는 멍하니 빛이 사라진 바위틈을 바라보았다. 몇 번 물러나며 몸집을 키운 큰 파도가 그녀가 앉은 발치까지 거품을 밀어올렸다. 쓸려나가는 포말을 헤아리던 눈길이 문득 아까의 바위틈에 닿았다.
잠시 후,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빈 술병에 잔이 부딪히며 스툴이 발에 감겨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달려나갔다. 신발이 모래 속으로 빠져드는 통에 허우적대며 바위틈을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바위를 움켜잡은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뭐지?”
그녀의 시선이 바위틈 사이에 놓인 것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물에 푹 젖은 검은 털. 작은 망아지와 비슷한 크기. 이마 위로 솟은 흰 뿔에 검붉은 얼룩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말? 사슴? 물개? 잠시 머릿속을 뒤져 가며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차례로 떠올리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본 적 없는 동물이다. 본능적으로 치밀어오르는 혐오를 누르며 찬찬히 검은 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작게 들썩이는 흉곽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살아 있다.
라고 생각한 순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파도에 깎여 들쭉날쭉한 바위에 행여 몸체가 긁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검은 동물을 들어올렸다. 잠든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미미한 온기가 남은 몸체가 미동도 없이 얌전히 들려 올라왔다. 크기에 비해 가벼운 무게를 이상하게 여길 겨를도 없이 모래톱에 검은 것을 옮겨다 놓은 그녀는 스툴로 그 몸을 덮었다. 커다란 천에 감싸인 검은 동물의 호흡은 여전히 느리고 얕아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얼핏 숨이 멎은 것 같아 보였다.
다시 한 번 찬찬히 검은 몸체가 움직이는 모양을 살피던 그녀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동물 병원…이 맞겠지?’
그런데 이마에 저런게 달린... 일단 망아지라고 하자. 여하튼, 저대로 동물병원에 데려가도 될까?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희귀종이라고 하면서 어딘가의 연구실에 실험 재료로 팔려가게 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 흠뻑 젖은 털을 스툴로 대강 닦아내면서 눈에 띄는 외상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검은 털은 각도를 달리해 바라보면 약간 푸른 빛이 돌았고, 다리쪽의 찰과상 몇 개와 뿔에 묻은 얼룩 외에 눈에 띄는 외상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망아지...가 바닷가까지 흘러 오게 된 거지? 그녀는 물기가 마르면서 체온이 떨어졌는지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몸체를 조심스럽게 품에 당겨 안았다.
‘우선 집으로 데려가야겠다.’
술기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느지막이 낚시를 나온 강태공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품안에 단단히 검은 것을 안고 최대한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변을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넓은 곳에서 편히 쉬라고 차 뒷자리에 눕혀 놓고는, 혹여나 눈을 떠 난동을 피우지 않을까 싶어 몇번이고 룸미러를 넘겨보다가 두어 번쯤 신호를 놓쳤다.
***
[……죽이실, 건가요?]
[피를 뒤집어 씌우거나, 뿔을 묶거나 하실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아무도……지 않게…]
검은 기린은 눈을 떴다. 어두운 가운데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이상할 정도로 어두워 다시 눈을 감았다 떠 보았지만 여전히 캄캄했다.
…이상하다. 기린의 눈은 가장 어두운 밤에도 빛을 놓치지 않는데…? 검은 기린은 그제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나무토막이나 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눈을 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이 아닐수도 있었다. 여전히 검은 시야에는 빛이 비치지 않는다. 짐승의 몸일지 인간의 몸일지도 알 수 없었다. 뭐가 되었든 좋으니까 손가락이든 갈기의 털끝 하나든, …제발.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움직여…!’
그 순간, 털끝 하나라도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린의 귓가에 소음이 아닌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닿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야. 약간의 호흡을 사이에 둔 속삭임은 조금의 망설임과 불안을 안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검은 기린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밀려왔다.
끊임없이 괜찮다고 말해 주는 따스한 목소리에 감싸인 검은 기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
그녀는 잠에 빠진 검은 망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집에 데려와 소금기를 씻어내고 말린 다음 상처를 소독하는 내내 이거 내일 아침이면 사체가 되어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는데, 절간처럼 적막한 집 안이 싫어 습관처럼 켜 놓은 텔레비전 소리에 놀랐는지 움찔거리며 경련을 시작했다. 크게 뜨인 밤하늘색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눈을 맞추지 못하고, 기운이 없어서인지 축 늘어진 몸이 간혹 불안감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일단 망아지를 눕혀 놓은 전기장판의 온도를 확인하고 깔아둔 담요 외에 몸 위를 덮을 만한 담요를 찾아놓은 다음,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는 검은 망아지의 등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야. …아마도.
정말 괜찮을지 어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정도밖에 없다. 깨끗이 씻기고, 상처도 소독해 약을 발랐다. 사람 약을 써도 되나 고민했지만. 뭐, 괜찮겠지. 다만 이마에 난 뿔…에 얼룩진 붉은 자국은 살살 닦았더니 지워지지 않아서 우선은 그대로 두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줄기를 토닥이자 검은 망아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선잠이 든 작은 짐승을 위해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일어나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
검은 도시에 내려앉은 인공의 별빛이 반짝였다. 이미 오래 전에 떠나온 곳이라 그리움보다 낯섦이 더했다. 운해 아래서 아스라이 일렁거리는 불빛에 익숙해진 눈에는 직접 닿아오는 다양한 색채의 광선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영파궁에서 보는 금화의 밤거리도 이렇게 번쩍거리지는 않았는데.’
켄마는 이내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메일함을 확인하는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봉래에서의 겉껍질을 벗어버린 다음에도 머리카락에는 마치 염색 시기를 놓친 것 같은 그라데이션이 남았다.
“…태각을 벗으면 금색이 될 거라며.”
이대로는 너무 눈에 띄잖아. 투털거리는 켄마에게 연왕 쿠로오 테츠로가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 정도면 괜찮잖아.”
금화의 저잣거리에는 더 해괴한 색도 많은걸. 켄마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게으른 고양이처럼 드러누운 제 왕에게 눈을 흘겼다. 황금빛 눈이 가늘어지며 찌그러지는 미간이 심기 불편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쿠로오는 실없이 입꼬리를 늘렸다. 나라마다 기린의 성정은 조금씩 편차가 있다지만 누군가 지금의 켄마를 본다면 빈말로도 인의의 생물이라고는 하지 못할 테지. 피식거리는 웃음 끝에 쿠로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색, 봉래에서는 전혀 위화감 없을 거고.”
뭐 어때? 라고 묻는 듯한 입꼬리를 본 인의의 생물은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찌그러진 미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짜증이 쿠로오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얏쿵이 보러 오겠다고 했었지~”
“…늦은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지 않아.”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본 연 주종은 연한 밀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총재 야쿠 모리스케를 발견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맞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기세 좋게 울리고, 거침 없는 삿대질에 다소 긴 관복의 소맷자락이 붉게 펄럭거렸다.
“대체 너라는 녀석은! 조의 때에는 적당히 몸만 걸쳐두다 도망치고, 장계는 올라가는것과 동시에 쾅쾅 인이 찍혀서 되돌아오다니! 인 찍는 기계를 만들어도 그보단 성의있을 거다!”
“빠른 결재는 왕의 덕목이라며!”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그리고, 며칠 전부터 대사도가 새로 만들어진 리가에 보급할 토지의 측량기준을 봐달라고 그렇게 쫒아다니고 있는데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냐!”
넘치는 위엄을 두른 채 연왕의 옥체와 정신의 강녕함을 통한 연국의 태평성대를 강하게 걱정하는 총재의 잔소리는 좀처럼 끝이 나질 않았고, 짐짓 그럴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야쿠의 잔소리에 가락을 얹는 주상의 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던 연 타이호 코즈메 켄마는 슬쩍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며 슬쩍 눈을 굴렸다. 그 순간,
“너도다, 켄마. 툭하면 봉래로 넘어가는 것, 모를 줄 알아? 테시로와 야마모토가 봐 준다고 해서 수도주후의 공무를 어물쩍 넘기려고 하지 마!”
상대가 천제의 대변자, 인의의 상징인 기린이라 해도 어림없다는 듯한 질타가 가차없이 날아들었다. 켄마는 몰래 빠져나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손을 모았다.
'드림 > hq : 십이국기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7 (0) | 2018.11.21 |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6 (0) | 2018.11.15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4 (0) | 2018.05.03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3 (0) | 2018.04.11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2 (0) | 2018.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