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서신을 보낸 게 스가와라 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안 왔을 걸요. 엔노시타의 말에 스가와라가 뿌듯함 가득한 미소로 답했다. '비국 기린의 수색을 위한 모임'에 등장한 츠키시마 케이를 본 인 타이호 엔노시타 치카라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치 '내가 왜 그 멍청한 흑기린 따위를 찾으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이 멍청이들아!' 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네."
"......"
그렇게까진 말 안 했어요. 츠키시마가 차완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명록차는 비국이 왕을 잃은 뒤 더욱 구하기 어려워졌다. 충국의 대관들 중 차를 사랑하는 인사들은 품귀현상을 빚은 비국산 찻잎을 아껴가며 마시곤 했다. 차를 좋아하는 주인을 위해 대국은 명록차를 어디서 융통하는지 여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츠키시마가 입을 열었다.
"제게 비국 기린의 수색을 부탁하시려는 것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충국도 지금 사정이 말이 아니다. 주요 무역국 중 세 곳이나 정세가 불안하다보니 사치재를 취급하는 충국의 기준가격이 날뛰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혼자서도 조정 일은 돌볼 수 있으니 마음 놓고 다녀오라고 말했지만...
***
"다녀와도 돼, 츳키."
이럴 때만 제법 왕처럼 말하는 야마구치가 얄미워 츠키시마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장계를 넘기는 옷소매와 종이가 스치는 소리 사이로 듣기 좋은 웃음이 낮게 깔렸다.
"싫다고 할 때가 아니야."
"기린이라면 갓 태어난 핏덩이라도 세계를 건널 수 있어. 명식을 일으킬 정도로 배짱 있는 놈이라면 제 발로 돌아오는 기량 정도는 보이라고 해."
"...츳키!"
제 왕의 나무람에 츠키시마가 광물 기준가격의 도표를 들여다보는 척 하며 대꾸했다.
"전하. 이백년쯤 지나니 슬슬 주위가 눈에 들어오시나봐요?"
"비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야마구치는 검토가 끝난 장계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츠시키마를 바라보았다.
"내 나라와, 츳키를 위해서야."
"......"
그, 츳키는 내가, 못미더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제대로 일 하고 있을 테니까! 마음 놓고 다녀오라며 웃어보이는 주인의 얼굴에 꽤 짙은 피로가 내려앉은 모습을 본 츠키시마는 삐뚤어진 입꼬리를 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
"수색은 이미 적임자가 있으니까, 츠키시마에게 부탁할 것은 다른 쪽."
"네?"
츠키시마의 물음에 스가와라가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영락궁 접견실의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스가와라 님!"
...문은 손으로 열고 들어와, 이것들아. 엔노시타의 서늘한 말에 타나카와 함께 들어온 니시노야까지 멈춰서 사과의 말을 외쳤다. 한참 떠들썩하게 안부인사와 근황을 묻는 말이 오가는 가운데 말 없이 앉아 홀로 찻물을 홀짝이던 츠키시마는 이제 그만 충국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때, 비공의 흔적은 찾았어?"
스가와라의 물음에 시끄럽던 두 마리 기린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말했다.
"아니요!"
"열두 나라 안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세계 밖이라는 거야...?"
"곤륜으로 넘어가 봤지만 거기에도 기린의 기척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남은 곳은."
봉래인가. ...연 타이호가 봉래의 태과 출신이었지? 엔노시타의 물음에 타나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케토라... 연국 대사마가 켄마는 요즘도 이따금씩 봉래를 오간다고 했어."
“무슨 일로? 뭐 흥미로운 거라도 있나?”
“시리즈의 신작…? 이 나오는 때에는 며칠씩 봉래에서 머문대요.”
“…시리즈?”
“신작…?”
“봉래의 놀잇감 같은 거예요.”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해진 인의의 생물들에게 엔노시타가 설명했다. 공기가 맞지 않아 이쪽 세계의 생물은 숨도 쉬기 어려운데 며칠씩이나... 연 타이호는 대단하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연왕 전하께 부탁드려서 잠시 타이호를 빌려야겠다. 그리고 타나카, 니시노야. 너희는 다시 한 번 세계 안을 찾아봐 줘."
"네!"
"그나저나... 비공은 괜찮을까요?"
엔노시타의 말에 가득한 걱정이 접견실 안의 기린들을 침묵시켰다. 짧은 정적의 끝에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냉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피의 저주가 씌인 데다가 명식을 일으켜 세계를 건넜다면 썩 온전치 못할 수도 있죠."
"츠키시마!"
꼭 말을 해도 저렇게! 화를 내는 타나카와 니시노야를 완전 무시한 채 차완을 기울이는 츠키시마를 보며 스가와라는 쓰게 웃었다. 어투는 둘째 치고 츠키시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명식을 일으켜 세계를 건넌 기린들은 종종 망가지거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곤 했다. 하지만 비국의 란과는 열리지 않았으므로 비공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츠키시마의 도움이 필요한 건 이 지점이지."
“……?”
“우리가 비공의 위치를 찾으면, 엔노시타와 함께 츠키시마가 비공을 데리러 가 주었으면 해."
"그러니까 그걸 왜 제가..."
"충국의 보물을 츠키시마가 아니면 누가 쓸 수 있어?”
츠키시마가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라고 물으려던 것을 접고 마음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상대는 세계가 시작된 이후 가장 오랜 시간동안 한 나라를 이끌어 온 기린이다. 모르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비공에게 문제가 있다면 식을 일으켜 돌아오는 것조차 무리가 될 수 있어. 안전하게 가자, 안전하게."
돌아갈 때 차주산 명록차 한 편 줄 테니까. 알겠지? 멍청한 비국 기린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지만, 스가와라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든 츠키시마는 가만히 차완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기왕이면 청영 112년산으로 부탁드립니다.”
***
불사의 몸인 지선도 죽을 만큼 다치면 한동안은 몸을 쉬게 두어야 한다. 오이카와는 십수개의 짧은살과 장살을 맞은 채로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화살촉이 살뿐 아니라 뼈도 상하게 했다. 이와이즈미의 구박과 약을 함께 삼키던 오이카와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자마자 받은 것은 백치의 발이 국새 대신 찍힌 가조의 칙령이었다.
[기린에게 위해를 가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차주후 오이카와 토오루를 가조의 장에서 폐하고 차주 영내에 유폐한다.]
죄의 재판과 처분은 비국에 새로운 왕이 생겨날 때 이루어질 것이며, 칙령을 받든 순간부터 오이카와 토오루는 차주의 경계를 넘는 즉시 역도로 간주되어 주살당하게 될 거라는 추관장의 지나치게 친절한 서신까지 읽은 다음, 오이카와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상처난 옆구리를 쥐고 비명을 삼켰다.
“잘 한다….”
“이와쨩은?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야?”
쿠니미쨩 서신에는 이와쨩 얘기가 없는데? 설마 나 팔아먹고 혼자 보신하는 거야? 이제 좀 살만한지 종알거리기 시작한 악우를 바라보던 이와이즈미가 간단히 답했다.
“네 감시역을 겸해서, 같이 유폐됐다.”
“그래도 역도 취급은 아닌가 보네?”
“나는 누구랑은 달라서 조정에 인망이 두텁거든.”
뭘 의기양양한 표정 하고 있는 거야! 이와쨩 주제에! 시큰거리는 옆구리를 쥔 채로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터뜨리는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그래서, 비공이 식을 일으키기 전에 네게 뭐라 말을 했다고?”
“그게... 말소리라기보단 머리에 직접 울리는 느낌이긴 했는데.”
기린쨩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던 검은 눈동자와, 작은 몸체에 어룽거리는 무지갯빛이 지워질 정도로 물든 핏자국은 지금도 눈을 감아도 생생히 떠오르는데, 비국 기린의 마지막 말만이 기억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싼 승산객들 가운데 여럿이 오이카와에게 흑기린이“저를 죽이실 건가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겼고, 결국 피의 부정을 뒤집어 쓴 기린이 명식을 일으켜 실종되어버린 탓에 오이카와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 되어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백치의 발이 회수되고, 긴급히 육관회의가 소집되어 마침내 백연궁에 흑주후 메이카쿠 슌페이의 가조가 열렸다. 모든 절차가 아주 빠르고 매끄럽게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옆구리가 결리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다시 한 번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말, 탐나는 인재네."
"이렇게까지 뱃속이 시커먼 것은 이 나라에 너 하나로 족해."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상은 너무나 순수한 나머지 그만 시커먼 계략에 넘어가서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거잖아!"
"순수해서가 아니라 멍청해서겠지."
이와이즈미의 말에 한없이 가볍던 오이카와의 어조가 가라앉았다.
"...맞아. 멍청했어."
"오이카와. 아직 비국 기린의 난과는 열리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실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기린쨩을 찾으러 떠날 수도, 백연궁에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오해를 정정할 수도 없다. 차주를 벗어나는 순간 동기로 무장한 금군에게 주살당할 텐데. 쥐고 있던 서신을 잘 말아 함에 넣은 다음, 오이카와는 서탁 위에 길게 엎드리고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기린쨩이 살아있다면, 빨랑 어디에선가 왕을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왔으면 좋겠다..."
이번만은 이와이즈미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드림 > hq : 십이국기au'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6 (0) | 2018.11.15 |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5 (0) | 2018.10.20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3 (0) | 2018.04.11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2 (0) | 2018.04.04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 십이국기 AU 드림_21 (0) | 2018.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