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십이국기 AU : 어느 날, 바람이 바뀌고
기린 카게야마와 차주후 오이카와, 그리고 그들의 왕인 그녀의 이야기.
진짜 느림 주의 / 설정파괴 및 캐붕 주의 / 본편에 안 나오는 인물 주의
4. 두 봉산공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첩첩산중.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십이국의 중앙부는 요마가 횡행하는 거친 땅이었지만 신성한 힘이 머무르는 황해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 봉산에는 요사스러운 기운 한 자락 자리할 틈이 없었다. 이곳은 기린의 땅이기 때문이다.
봉산은 신수를 기르는 데에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어찌어찌 요마가 들끓는 바다를 넘어 발을 딛었다 해도 거친 땅은 기린기가 내걸리는 승산의 때 외에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함부로 봉산을 오르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았다. 서왕모와 벽하현군, 그녀를 따르는 여선들, 그리고 봉산의 주인인 기린만이 온전히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을 뿐이었다.
자연과 천제의 보호를 받는 요람과도 같은 보도궁 안쪽의 우거진 수풀과 제 무게를 못이겨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두 쌍의 눈동자가 빛났다.
딴에는 기척을 없앤답시고 숨소리까지 가라앉히고 있었지만 찾으러 온 이들이 어디까지 왔을지, 과연 자신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자꾸만 몸을 꼼지락거리는 통에 바람 한 점 없는 수풀이 저절로 흔들렸다.
“봉산공…! 어디 계세요?”
“정말, 어디에 숨으셨는지 보이지를 않네요!”
“두 분 모두 이제 간식 드실 시간이에요~!”
여선들은 벌써 아까 전부터 들썩거리는 수풀을 애써 못본척 하며 나무 아래에 모여들었다. 수풀을 등진 여선들 사이에서 은밀한 눈짓이 오갔다. 그 중 머리를 땋아 올린 여선이 짐짓 걱정스러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간식은 특별히 두 분이 좋아하시는 만쥬로 준비했는데…. 이를 어쩌지?”
“리공도, 비공도 보이지 않으니 어쩌지요?”
“어쩔 수 없네요. 우리끼리 먼저 먹을 수 밖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여선의 말에 등 뒤 수풀이 세차게 움직였다. 수풀 그림자에 숨은 작은 몸이 바둥거리며 내는 부스럭 소리와 함께 소근소근 숨죽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조금 더 기다려.’
‘…하지만, 미츠요가 만쥬를 다 먹어버릴 거라고…!’
‘그럴 리가 있냐!’
아직 어리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여선들의 얼굴 위로 소리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흐음- 이 정도로는 안 통한다 이거지…? 미츠요, 라고 불린 여선이 옆에 선 여선을 불렀다.
“세이카, 가서 만쥬를 가져오세요. 도무지 봉산공이 보이지를 않으니 우리는 저쪽 장각(暲閣)에서 만쥬를 먹도록 하지요. 아, 내실에 꽃차를 준비해 두도록 했으니 그것도 함께.”
“알겠습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내실을 향한 세이카의 앞으로 저녁놀을 물들인 것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나, 나… 여기 있어, 세이카!”
“어머나, 리공! 어디에 계셨어요?”
여기, 수건을 좀 주겠어요? 세이카는 덤불이며 흙이 묻어 꼴이 엉망인 아이를 정성으로 닦고 털며 물었다. 다 알고도 묻는 다정스런 말에 리국의 작은 기린은 주홍빛 눈동자를 굴렸다. 슬쩍 수풀을 향한 눈이 한 번 크게 꿈벅이고는 다시 세이카를 향했다.
“저쪽 바위 너머에 비서(飛鼠)가 있다고 해서…!”
“또 두분이서만 몰래 전변해서 넘어가셨군요?”
“아냐, 아냐! 히요우랑 교쿠야도 같이!”
히요우와 교쿠야는 두 봉산공의 유모인 여괴의 이름이다. 이제 겨우 짐승의 태를 벗고 사람과 짐승의 형상을 오가는 것에 익숙해진 작은 기린들을 홀로 다니게 할 여괴들이 아니긴 했다. 분명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겠지. 그래도….
“보도궁 밖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응….”
수건에서 놓여난 주홍빛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하게 가라앉으며 우물쭈물했다.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에 세이카는 그만 엄하게 굳혔던 표정을 풀고 웃어버렸다. 아무리 표정을 꾸미고 목소리를 가다듬어도 여선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기린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봉산의 주인인 비공과 리공은 그 귀하다는 흑(黑)기린과 주(朱)기린이다. 두 나라 모두 왕이 없는지 오래인지라 흉흉한 소문들이 속세의 말이 닿기 힘든 봉산에까지 흘러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을 거야.’
현군의 탄생을 예고하는 기린이 둘이나 태어났다. 여선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찬 것 외에는 조금의 흠도 없는 상서로움과 인의의 상징. 봉산의 여선들에게는 그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돌본다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그러니 어찌 미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이카는 제 미소에 안심하여 따라 웃는 기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이제 간식을 먹으러 갈까요?”
…응? 작은 기린의 주홍빛 눈동자가 또 다시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대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지? 세이카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놓으면서도 수풀 쪽을 돌아보다가 뒤를 따르던 미츠요와 눈이 마주쳤다. 기린의 얼굴에 서린 불안을 알아챈 미츠요의 살구씨같이 예쁜 눈매가 사르르 가늘어졌다.
‘안심하세요. 비공은 제가 모실게요.’
리국의 작은 기린은 그제서야 마음 놓고 봉로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걸음을 늦춰 앞서 가는 무리와 거리를 벌려 놓은 미츠요가 곧장 수풀을 향해 걸어왔다. 소리도 없이 하늘거리는 미츠요의 치맛자락을 보고 있던 수풀 속의 작은 기린은 머리 바로 위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공, 간식 드실 시간이에요.”
“…….”
어라, 여기 안 계신가…? 짐짓 당황한 척 이곳저곳을 찾아볼것처럼 걸음을 옮기려던 미츠요는 치맛자락이 걸리는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수풀 속에서 나온 작은 손이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미츠요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
“비서를 많이 잡으셨나요?”
대답 대신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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