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야치 : 너에게, 붙기를.
@odknocker
동인설정 및 캐붕 주의
히토카, 고등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하자.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든 야치의 눈앞에 혈관에 좋은 신생 물질이 들어있다는 심장약 광고가 한가득 들어왔다.
[강심장이 된다!]
반대편의 기사에 집중하느라 살짝 느릿해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강한 필치로 인쇄된 광고 문구를 타고 넘어왔다.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에 더 신경써야 되니까 통학거리가 너무 멀어도 곤란하잖아. 시라토리자와 정도면 괜찮지?”
집에서 가깝고, 편차치도 적당하고. 신문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에도 야치는 괜히 어깨를 움찔거렸다. 저, 시라토리자와는… 아…, 그러니까…. 머뭇거리며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딸을 향해 야치 크리에이티브의 오너 디자이너 야치 마도카는 사장님의 얼굴을 했다.
“히토카. 엄마가 늘 뭐라고 말하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그래서?”
“시, 시라토리자와는 약간 상향이에요. 꼭 합격한다고는…!”
“히토카.”
끝이 뚝 떨어지는 저음에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마저 멎었다. 야치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왜 도전하기 전부터 실패할 생각부터 하지? 그런 말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최선을 다 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네 부정적인 태도가 스스로를 옭아맨다는 걸 알고 있니?”
죄송해요…. 작아지는 딸의 목소리에도 어머니의 사장님 모드는 풀리지 않았다. 강한 심장을 만들어 준다는 광고지가 반의 반으로 접혀 심장만 남은 채 식탁 위에 놓였다. 물끄러미 광고지를 바라보는 딸을 내려다보던 어머니의 예쁘게 색이 입혀진 입술 사이에서 옅은 실망의 빛을 띈 짧은 숨이 쏟아졌다. 히토카는 그 숨에 얻어맞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시노마키 시의 고객사에 다녀올 거야. 꽤 늦어질 테니 저녁은 먼저 먹으렴.”
“네….”
다녀오세요! 일하러 가는 사람을 배웅할 때에는 웃으며, 라는 것이 야치 가의 규칙이기 때문에 겨우겨우 피워 낸 웃음은 철제 현관문이 닫히며 나는 도어락의 잠김음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야치는 그제서야 겨우 어머니의 것보다 조금 더 무거운 빛을 띈 긴 숨을 내쉬었다가 그대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긴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오늘도 힘내자!”
야치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
카게야마 토비오는 한 장의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립 고등학교 입학시험 원서. 시라토리자와 학원 고등부의 일반 수험을 치르겠다고 말했을 때, 카게야마의 담임 교사는 본인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군, 지금 시라토리자와…라고 했니?” 그 목소리에 담긴 당황과 약간의 경악이 부당하다는 듯 카게야마는 입술을 이 사이에 한번 꾹 눌러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네. 시라토리자와의 일반 수험전형에 지원하겠습니다.”
“하지만… 너, 아오바죠사이 쪽에서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제의가 와 있지 않니?”
두 학교 모두 사립 학교라 시라토리자와에 원서를 내면 아오바죠사이 쪽에는 갈 수가 없어. 곤란한 듯 카게야마의 원서를 한참 내려다보는 담임 교사를 향한 카게야마의 눈매가 가늘게 날카로워졌다. 그런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러니까 시라토리자와를 선택한 거라고!’
세이죠에는 가지 않는다고 정했다. 조금이라도 더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내 최고의 강호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현재 미야기 현내 최고의 강호는 시라토리자와다. 하지만 시라토리자와에서는 특기자 전형의 권유가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험을 봐서라도 시라토리자와 고등부에 입학해야 했다. 한참 뜸을 들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던 담임 교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고 한 번 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후에야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군, 공립 고등학교는 어디를 지망하기로 했지?”
“…??? 카라스노입니다.”
“카라스노,라….”
카라스노…. 몇 번이나 학교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담임 교사는 결국 카게야마의 원서에 확인 도장을 날인한 후 시라토리자와 라고 적힌 문서함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노력해 보도록 하지.”
“넵!”
“…그만 돌아가 봐.”
급격히 피로함을 드러내며 담임 교사가 손을 내저었다. 어째서인지 ‘시라토리자와 학원 고등부 과거 5년간 기출 문제집’을 선물로 받은 카게야마는 교무실 문을 나서면서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꽉 쥐었던 주먹을 털어낸 카게야마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체육관을 향했다.
…아직 수험까지는 2개월이 남아 있었다.
***
야치 히토카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막았다. 매번 모의고사를 보러 올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는 차원이 다르다.
‘위,위,위험해! 진짜 입에서 나올 것 같아!’
왜냐하면 오늘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시험이니까…! 교실을 가득 채운 경쟁자들이 시험을 몇십 분 앞둔 지금까지 끊임없이 문제집이나 정리 노트 등을 들여다보며 막판 스퍼트에 여념이 없었다. 잔뜩 예민해진 사람들은 기침 소리 하나, 의자 끄는 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공기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수 차례의 모의고사를 보며 익숙해진 패턴이다. 아까부터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모으는 동시에 옆자리에 앉은 야치의 심장이 튀어나오게 하는 데에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은
“아, 또 떨어졌네.”
야치의 옆자리에 앉은 훤칠한 키의 남학생이다. 벌써 세번째다. 첫번째는 지우개, 두번째는 샤프 펜슬, 그리고 다시 지우개. 물건을 떨어뜨릴 때마다 무심한 듯 한마디씩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떨어졌다.” “아, 떨어져버렸네.” “또 떨어졌네.” 라는 말이라, 남학생이 입을 열 때마다 교실 안의 모두가 흠칫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대범한 태도의 남학생과는 달리 그 시선을 모두 느끼는 야치는 이제 슬슬 심장 끄트머리가 목구멍을 넘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자꾸 떨어지는 거지?”
책상이 기울어져 있나? 이제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책상을 이리저리 꾹꾹 눌러 보기 시작하는 남학생을 향해 조금 더 짜증이 섞인 시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 아래로 짙은 푸른색의 트레이닝 복을 입은 남학생의 인상이 진지하다 못해 약간 험악해 보여서인지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침내 네 번째로, 컴퓨터용 사인펜이 도르르륵 책상 위를 흘러 내려갔다. 교실 안의 모두가 한 순간 동작을 멈추었기 때문에 사인펜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생각보다도 크게 들렸다. 남학생마저도 잠시 손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 볼 정도로.
‘어,어어… 어떻게 하지?’
남학생이 또 떨어졌느니 운운 하며 말을 했다가는 당장 시험이고 뭐고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고, 다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싸움 같은 게 일어나면 안 될 일인 데다가 이제는
‘나도 조금, 진정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야치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용기를 모두 끌어모아 목구멍까지 나온 심장을 진정시킨 다음, 남학생의 책상에서 내려와 야치의 발 밑까지 굴러온 컴퓨터용 사인펜을 주워 들고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남학생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사인펜이 책상 위에 올라가서 붙었습니다!”
“???”
“…이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야치는 슬쩍 덧붙인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곧 흥미를 잃은 듯 각자의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야치가 시선을 돌리자,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한 남학생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화가 난 건가? 주제넘게 참견해서 화가 났나? 어떻게 하지? 시험도 보기 전에 살해당할 지도 몰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야치와 달리 한참동안 뚫어져라 야치를 들여다보던 남학생이 자리에 앉으며 작게 목례하고 대답했다.
“감사함다.”
아, 네…! 야치가 적당한 인사말을 고르는 사이, 교실의 문이 열리고 시험지와 답안지를 든 감독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시험 중 주의사항과 답안지 작성 요령의 설명이 이어지고, 쉴 틈 없이 시험 개시를 알리는 본령이 울렸기 때문에 결국 야치는 남학생과 더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
말에는 힘이 있다. 언령이라고도 하는 말의 주박은 암시와도 같아서, 계속해서 듣다 보면 결국 그 말의 힘에 이끌려 말하고 들은대로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떨어진다”를 반복해서 들은 야치 히토카가 시라토리자와 학원 고등부의 일반 수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과 같이. 물론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 날, 야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수학과 영어의 몇 문제의 답안을 밀려 쓴 것을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 그럼 공립은…카라스노구나. 조금 거리가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어머니는 우려와는 달리 산뜻하게 시라토리자와를 포기했다. 카라스노는 어머니의 모교였다는 학교로, 편차치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야치는 진학 특별반에 지원한 데다가 주요 다섯 과목을 모두 보기 때문에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2월의 카라스노 고교는 난방을 충분히 했음에도 어딘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교실 안은 얼마 전의 시라토리자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시선을 책상에 고정한 학생이 반, 자유롭게 작게 소근거리거나 음악을 듣는 학생이 소수, 잠을 자거나 아예 비어 있는 책상도 몇 개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분위기에 야치는 비장의 정리 노트를 펼치다가 문득 시라토리자와에서의 그 남학생이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기억에 남은 것도 아니지만 막연히 그 사람도 시라토리자와에 합격하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있었다. 시험 당일에 “떨어진다”를 몇번이고 말했던 사람이니까. 노트를 펴서 마지막 체크를 하기 전에, 야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남학생을 위해 기도했다.
‘모쪼록, 합격하기를.’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겨울의 끝. 야치 히토카가 예의 남학생을 다시 만나 이름이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것과, 카게야마가 바로 시라토리자와 수험일의 그 남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도 몇 번의 계절이 더 지난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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