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전력 60분
106번째 주제 : 꽃이 진 후
하이큐 스가와라 코우시 드림
※ 날조와 캐붕 주의
저녁 늦게 비가 내렸다. 먼지잼이나 겨우 할 줄 알았는데 꽤 쏟아져 내리는 통에 마루나 장지문이 젖을까 싶어, 스가와라는 한밤중에 몸을 일으켜 덧문을 걸었다. 대문 밖 어딘가에서 양동이 같은 금속성의 물건이 바람에 굴러가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긴 덧문을 들고 폭우 속을 오가며 겨우겨우 모든 창에 덧문을 달고 나니 장지문 대신 집주인이 흠뻑 젖었다.
덧문을 닫으려다 잠시 손을 놓았다. 번쩍이는 섬광이 지난 자리에 창백하게 질린 라일락 나무와 벚나무, 앵두나무와 살구나무가 몸서리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 꽃들이 꼼짝없이 빗줄기에 두들겨 맞았다. 아마 대부분이 이 밤을 넘기지 못할 듯 했다. 싱크가 맞지 않는 비디오와 오디오처럼, 섬광을 뒤따라 온 굉음이 부서져라 하늘을 울렸다. 스가와라는 그 청각적 폭력을 막아내려는 것처럼 힘주어 덧문을 닫았다.
곧 익숙한 어둠이 눈을 쉬게 했다.
아무래도 집에는 정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녀였다. 피차 일하는 처지에 단독주택은 안전성이나 유지관리 차원에서 힘들지 않겠냐며 맨션이나 아파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는 스가와라의 제안을 고갯짓 하나로 묵살한 그녀는 ‘집은 무조건 단독주택으로, 툇마루와 정원이 있을 것!’ 이라는 조건을 제 턱 끝에다 대고 벼슬처럼 휘둘러댔다.
“코우시한테 정원 가꾸라고 안 할 테니까!”
도대체 언제 부동산 중개인을 구워삶았는지, 그녀는 중개인 아저씨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일대의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매물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이 집은 배수가 좋지 않아서 안 돼! 이 집은 나무가 없어서 안 돼! 이 집은 옆 건물 때문에 채광이 별로라 식물 키우기에 안 좋아. 탈락! …MKU38의 총선거도 이보다는 덜 엄격할 것 같았다. 중개인 아저씨의 이마에 번들거림이 조금씩 늘어나던 어느 오후, 전날 내린 눈이 제법 쌓여서 차량이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미끄러질까 두려워하며 언덕을 올라 그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잠시 동안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스가와라가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집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적당히 나무가 있고, 적당히 땅이 있고, 약간의 잔디와 약간의 텃밭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적당히 눈이 쌓여 있어서 뭐가 뭔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탈락일까. 이제는 조금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스가와라의 눈에 그녀가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흰 눈이 가득 쌓였을 뿐 아무것도 없는 정원을 등진 그녀가 스가와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코우시, 이 집이야! 우리 집!”
그녀는 놀랍게도 집 안에는 들어가보지도 않고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덕분에 이사한 후 일년 가까이 두 사람의 주말은 집안의 이것저것을 수리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벽을 바르고, 낡은 조명을 바꾸고, 선반을 설치하고, 화장실은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업자를 불렀다. 몇 개의 과실수와 꽃나무, 작은 연못이 있고 한 쪽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이 있던 정원은 그녀의 손 안에서 점점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크기만 하고 제멋대로 뻗어 있던 가지들이 잘려나가고 다듬어졌다. 구획이 나누어진 꽃밭에는 피고 지는 시기가 다른 여러 가지의 꽃들을 얼핏 무질서하게 보일 정도로 심어 두었는데, 한 해를 두고 보니 계절별로 끊기는 일 없이 각색의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텃밭에는 쌈야채와 토마토가, 작은 연못에는 빨갛고 흰 꼬마 잉어가 두어 마리 헤엄치기 시작했다. 깃털과 나뭇가지와 주워 온 모든 빛나는 것들로 둥지를 장식하는 새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는 네 번의 계절이 두어 번쯤 지난 어느 봄, 툇마루에 가만히 앉아 웃음지었다.
“있지, 코우시. 내가 왜 덜컥 이 집을 우리 집으로 결정했는지 알아?”
글쎄?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가와라를 향해 돌아앉은 그녀가 처음 이 집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원을 처음 보았을 때, 딱 지금 같은 그림이 떠올랐어. 눈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도, 이 풍경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여기엔 라일락 나무가 있고, 맞은편엔 앵두나무가. 이 앞에는 수선화랑 디기탈리스가. …아, 나팔꽃이랑 함박꽃이랑 금낭화가 있어…! 하고. 이상하지?”
그렇게 말하며 웃어버리는 그녀의 뒤로 만개한 봄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이 가득한, 사랑스러운 공간. 불편한 것들을 하나하나 두 사람의 손으로 고쳐나간,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한 집. …그제서야 스가와라는 이 집을 온전히 그와 그녀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밤이 지나고 덧문 틈으로 빛이 새어들었다. 스가와라는 밤중에 맞은 비 덕분에 몸이 무거워 한참을 뒤척이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비는 그새 그친 듯 했다. 오목하게 파인 덧문의 손잡이에 손을 끼워 넣은 스가와라가 한참을 망설이다 힘을 주어 밀었다. 덜컹거리며 밀려나는 나무문에 가려졌던 풍경이 드러났다.
“……왜?”
꽃잎이 떨어져 약간 줄긴 했지만, 대부분의 꽃이며 나무가 성했다. 간밤에 그렇게 비바람이 불었는데도. 그렇게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는데. 어째서. 스가와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겨나가기 시작했다.
“왜 너희는 멀쩡한 거야…”
천천히, 허물어지듯 주저앉은 스가와라를 만개한 봄의 정원이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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