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전력 60분
71번째 주제 : 눈사람
하이큐 오이카와 토오루 드림
빨간색 털모자가 하얗게 변했다. 아이의 장갑에도 덕지덕지 눈이 더께가 되어 붙었다. 아무렇지 않게 모자를 벗어서 툭툭 털고, 장갑에 붙은 눈을 떼어 가며 눈을 뭉치고 있는 아이의 볼이 발갛게 얼었다. 꽤 오래 밖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옆에는 제 반만한 높이의 눈덩이가 두어 개 놓여 있었는데, 내리는 눈이 고스란히 쌓여 길쭉한 원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차가운 눈송이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녹아내리며 따끔거리자 아이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입과 코 주위를 스윽 닦았다.
눈이 내리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자고 했었다.
이와이즈미 부인은 상냥한 사람이었기에 상처받을 아이에게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해가 바뀌기 전에 아이가 기다리는 사람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가 돌아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 것’ 이라며 쓰지 않는 장갑이나 목도리나 나뭇가지나 조약돌 따위를 모았다. 나뭇잎이 얼굴색을 바꾸고, 바람에 냉기가 실려 오자 아이의 기대는 풍선처럼 부풀어갔다. 그리고 기어코 아이가 사는 동네에 눈사람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의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이와이즈미 부인이 말리기도 전에 뛰어나가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도 눈길을 시계와 전화기, 혹은 브리프 케이스 안의 문서를 향해 두는 사람이었다.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천진한 아이. 그 작은 머리로도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녀를 연기할 줄 알았다.
‘그래도, 돌아오셨을 때 눈사람을 보면 좋아하실 지도 몰라.’
이미 흠뻑 젖어버린 털장갑 안의 손가락이 화끈화끈하며 따가웠지만 아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크게 만들어야 되는데. 마당을 뱅글뱅글 돌며 눈덩이를 굴리는 아이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즐거운 놀이가 아닌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힘들여 굴린 눈덩이가 아이의 가슴팍에 올 정도로 커다래졌다. 왠지 가슴이 답답해진 아이가 목도리를 풀어헤치려고 잡아당겼을 때였다.
“...그거, 재미있어?”
나무 울타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아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이는 묻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덩이를 더 굴렸다. 제법 쌓인 눈 덕분에 눈덩이는 한 번 굴릴 때마다 쑥쑥 커져갔다. 볼은 발개져서는 입까지 비죽 내밀고 눈만 죽어라 뭉치고 있는 아이에게 남자아이 –오이카와 토오루- 가 다시 말했다.
“좋아서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거 왜 만드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벌칙이야? 정말 궁금했던 모양인지 자꾸 묻는 토오루에게 아이는 그만 화가 났다.
“너, 이와쨩 보러 온 거잖아? 이와쨩은 집에 있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 아이와 만난 이후로 늘 아르릉거리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진심으로 내친 적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달려 있던 울타리에서 훌쩍 내려와 아이의 집 바로 옆의 이와쨩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마당을 가로지르려는 오이카와의 눈에 아이가 기껏 굴려 키운 눈덩이를 들어 옮기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양이 잡혔다. 울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내가 도와줘야 해?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고까지 했는데? 오이카와씨 너무 착한 거 아니야? 궁시렁거리는 입과 달리 발은 성큼성큼 걸어서 나무 울타리를 넘었다.
왜 굳이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했을까. 보아 줄 사람도 없는데. 함께 만들고 싶었던, 곁에 있었으면 했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텐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이 아이를 쥐고 흔들었다. 들어보려고 해도 꼼짝도 않는 눈덩이가 보기 싫어져 확 발로 부수어 버리려고 발을 들자, 눈덩이가 공중부양이라도 한 듯 떠오르더니 꼭 오이카와 토오루같은 새된 목소리로 짱알거리기 시작했다.
“기껏 만들어놓고 왜 발길질이야.”
“......”
“왠-지 재미없어 보이지만, 같이 할래.”
“재미없어 보이면 하지 마.”
“하다 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어.”
“없어.”
“있어.”
“...없어.”
“있다니까.”
그 날 눈은 늦은 밤까지 내렸고 두 사람은 마당과 골목에 일곱 개의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이는 오래도록 눈을 맞은 탓으로 사흘을 내리 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이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흘 뒤, 반쯤 녹은 눈사람들을 보며 아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눈물에 매우 약하다.
그리고 첫 눈은 항상 셋이서 함께 맞이하는 것으로 정했다.
“토오루쨩, 장갑은 있어?”
그녀의 말에 오이카와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흔들어보였다. 그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혀를 찼다. 꼭 해야 되냐, 그거. 이와이즈미의 투덜거림에 그녀가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물론이지. 매년 만들어왔잖아? 만들 거잖아?”
“제일 크게 만드는 사람이 빵 사기.”
“...손톱만하게 만들면 되는 거지?”
“아아아니! 제일 크게 만드는 사람이 빵 얻어먹기!”
투덜거리면서도 슬슬 눈을 뭉쳐 화단 난간이나 벤치 위에 굴리기 시작한다. 곧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눈덩이를 불리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구공만해진 눈덩이를 들고 눈이 쌓인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그녀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이 약간 가늘어져 안타까운 빛을 띄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공원 한켠에 눈사람을 나란히 세워 두고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정석대로 동글동글하니 잘 만든 이와이즈미의 눈사람과, 어째서인지 약간 네모나게 만들어진 오이카와의 눈사람 사이에 일부러 작게 만든 것이 분명한 그녀의 눈사람이 세워졌다. 제멋대로지만 나란한 눈사람을 보며 오이카와는 마음 한 조각에 바람이 스민 듯 서늘해졌다.
너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까. 같이 눈사람을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는 내가 외로워 질 것 같은데.
절대로 입 밖에는 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오이카와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그만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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