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버스 AU
센티넬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가이드 드림주의 이야기
= 간단한 인물 설정 =
오이카와 토오루
- S급 센티넬. 파장의 컬러는 진홍. 소학교 때 센티넬 발현 이후 드림주와 임시 페어로 활동
- 드림주와의 파장 동조율 83%. 발현 당시는 B급, 위기상황시 AA급 센티넬로 등록되었으나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17세인 현재 S급으로 승급하여 학계의 특이 케이스로 주목을 받음
카게야마 토비오
- 현 일본내 등록 센티넬 중 유일의 SSS급(측정불가) 센티넬. 파장의 컬러는 암청. 고등학교 1학년 4월에
센티넬 각성과 동시에 폭주했으나 드림주에게 세이프가이딩되어 CIAS에 등록됨
- 드림주와의 파장 동조율은 99%로, 학계에도 케이스가 없는 높은 수치로 주목받음
드림주
- 가이드. 소학교 때 가이드 각성과 함께 센티넬범죄의 피해자가 됨
- 오이카와 이외의 남성 센티넬과의 성적 접촉에 심한 거부감을 보임
- 오이카와 이외의 다른 센티넬과의 동조율이 현저히 떨어져 심각한 가이드부족에 시달리던 CIAS도 두 사람 모두 성인이 되면 오이카와와 정식으로 각인 절차를 밟은 후 1:1 페어로 활동하게 하려 했으나, 카게야마가 나타나게 되면서 계획이 백지화됨
드림전력 주제들로,
좋은 주제가 나올 때마다 이어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1. 상실 (오이카와 루트)
"지금 뭐라고 했어요?"
서슬 퍼런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전일본이형능력체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을 거느린 채 오이카와와 대각으로 서 있던 CIAS 센다이 지부장, 야마모토 쿠니히로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쩡한 겉가죽이 자아내는 일견 무해해 보이는 미소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제법 잘 먹혀드는 무기였다.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는 상대다. 그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자, 자. 오이카와 군, 그렇게 화를 내지만 말고-"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죠. ...내 가이드를 어쩌겠다고?"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오이카와의 주변에 진홍빛 아지랑이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불꽃에 휩싸인 오이카와가 나른하게 웃음지었다. 홍차색 눈동자가 사르르 눈꺼풀에 덮여가는 모습을 맞은편의 야마모토와 연구원들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바라보았다. 아니, 실제로도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야마모토와 연구원 여섯 명을 죄어 놓은 오이카와가 한 걸음, 야마모토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막혀오는 압박에 여성 연구원 한 명이 이상한 신음을 내며 정신을 놓았다. 오이카와는 신기하다는 듯 몸을 기울여 야마모토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잊으셨나봐요, [아오바 구 센티넬 폭주 사건]."
내 가이드를 건드린 그 쓰레기 새끼를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야마모토의 눈을 들여다 볼 때의 데드마스크같은 무표정을 벗어던지고 어느 새 월간 배구에 종종 등장하는 훈남 배구 선수의 얼굴로 미소짓는 오이카와를 마주보며, 야마모토는 그가 센다이 센터로 첫 발령을 받은 해의 사건을 떠올렸다.
수년 전, 아오바 구의 한 주택가 인근에서 폭주한 A급 센티넬 Y가 본능적으로 가이드 파장을 감지하고 한 소녀를 찾아냈다. 갑자기 하늘에서 뛰어내려와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소학생이었던 그녀는 성인 남성인데다 센티넬인 Y에게 제대로 된 반항 하나 하지 못하고 잡혔다. 도망가려던 자세 그대로 품에 안긴 소녀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댄 Y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제 막 가이드 발현이 시작되려던 소녀의 파장은 폭주한 A급 센티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 더, 깊은 접촉이 필요하다.' 폭주의 영향으로 사고회로의 작동이 멈춰버린 Y는 다급한 손길로 소녀를 감싼 천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접촉한 센티넬에게서 전해지는 충격과 자신이 마주하게 된 상황에 대한 공포로 얼어붙은 소녀는 모자란 숨을 토해내며 울먹였다. 어디에도 이 상황을 변화시킬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Y는 아오바 구의 한 쓰레기통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Y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환경미화업체의 직원으로, 쓰레기통을 가득 채운 옷가지에 짜증을 내며 꺼내놓으려다가 그것이 옷가지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신고했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과학수사대의 검시관과 감식반원들은 시체를 확인하자마자 CIAS에 협조를 요청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 하나 없는 Y의 모든 뼈가 3cm이하로 잘게 부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간 가지각색의 센티넬 범죄 희생자들의 시신을 보아 온 검시관도 고개를 저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사망추정시간이었는데, Y의 생체반응이 확실히 사망으로 돌아서기까지 시간이 유독 길었다는 것이었다. '심장에서 먼 부위부터, 하나씩 하나씩 분질러가면서 살폈을 겁니다. 정신을 놓은 것 같으면 깨워가면서,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센터 소속의 모든 센티넬을 대상으로 조사가 시작되려는 찰나, 막 학교가 끝나 하교하는 것 같은 차림새의 남녀 소학생 두 사람이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것이 야마모토 쿠니히로가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의 가이드를 처음 만난 날의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Y를 살해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 센티넬 각성을 마쳤음을 알렸다. 의도가 명확하고 수단이 악랄하기 그지없으나 Y가 거듭된 폭주로 폐기예정인 센티넬이었다는 점과 오이카와가 형사미성년자인 점, 그리고 센티넬에 비해 현저히 수가 부족한 가이드를 지키려고 그랬다는 정상이 참작되어 오이카와에게는 센터에서의 유폐와 보호감찰 처분이 내려졌다. 그리고 오이카와와 함께 가이드 각성을 한 그녀 역시 센터에 등록되어 성년이 될 때까지 오이카와의 임시 가이드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성인 남성 센티넬에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였으나, 오이카와와 페어로 활동하며 많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 후로 5년 후, 4월. 그녀가 센터에 한 소년을 데리고 나타났다. 부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학교에서 센티넬 각성을 시작하기에 세이프가이딩을 하고 데려왔다는 소년의 이름은 카게야마 토비오. 얼마 후 열도 유일의 트리플 S 레벨, 측정불가의 타이틀을 얻게 될 센티넬이었다. CIAS로써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세이프 가이딩의 효과인지 그녀와 카게야마의 동조율은 99%에 달했다. 현재 그녀의 센티넬인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동조율인 83%도 높은 편이었지만 100%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동조율은 학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먹이감이었다. 완전히 카게야마의 전담으로 하겠다는 것은 무리다. 오이카와의 제 가이드에 대한 과보호와 집착은 이미 유명하니까. 다만 세 명을 한 페어로 묶어두겠다는 말에도 저렇게 도끼눈을 뜨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야마모토는 따끔거리는 목구멍에 애써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 1:1 대응관계로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건, 오이카와 군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그 더럽게 귀여운 후배님과 내 가이드를 공유해라?"
"가이드로 각성한 이상, 그녀에게도 의무는 주어집니다."
그리고 카게야마를 살려 데려온 것은 그녀이지요. 야마모토의 말에 오이카와의 불꽃이 꺼졌다. 연구원들과 야마모토를 죄던 압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이미 정신을 잃고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주저앉는 가운데 야마모토만이 겨우 서서 오이카와를 마주보았다. 수년 분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처럼 오이카와가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하... 깊은 한숨이 이어진 끝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었다.
"가 볼게요. 저분들에겐,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야마모토는 대답 대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인 후 가볍게 비틀거리며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야마모토는 안심하고 기절했다.
2. 또 다른 세계 (카게야마 루트)
불꽃이, 타오른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푸르다 못해 검은 눈동자 속에서 제물도 없이 홀로 피어난 불꽃이 흐드러졌다. 어깨를 타고 흐르며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와 마침내 심장에 옮겨붙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푸른 아지랑이가 카게야마의 전신을 감싸는 순간, 카게야마는 지금은 이 불꽃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없다는 것과 지금 이 불꽃을 제어하지 못하면 제2체육관에서 함께 연습 중이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원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중해야 한다. 심장에 자리잡은 불꽃이 퍼지지 않도록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었다.
"제왕의 토스를 써 보지 그래?"
상대의 블로킹과, 덤으로 같은 편까지 따돌려버리는 토스 말이야. 안경 쓴 꺽다리, 츠키시마 케이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카게야마가 얼굴을 구겼다. 일부러 도발하는 것을 알면서도 뇌관에 부싯돌을 튕기는 듯한 말에 욱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네 이놈 츠키시마아아!" 마음의 동요가 얼굴에 드러났는지 타나카 선배가 츠키시마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가 사와무라 선배에게 제지당하는 것을 보며 카게야마는 조금씩 숨을 내뱉었다. 고요하게. 흔들림 없이. 이 시합을 이겨야 카라스노에서 세터를 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사와무라 선배가 올린 공을 츠키시마가 토스했다. 생각보다 위력이 있는 야마구치의 스파이크를 타나카 선배가 주웠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세터 포지션으로 날아오는 공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눈을 돌렸다. 야마구치와 츠키시마가 블로킹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히나타에 비할 수 없는 신장과 정확한 블로킹 판단. 반응속도마저 빠른 편인 츠키시마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빠른 토스가 필요하다. 히나타 멍청이의 운동능력과 스피드라면...
'빠른 토스를 칠 수 있을지도!'
토스의 방향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자세로 카게야마가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카게야마의 손에 닿은 공은 궤도를 틀어 빠른 속도로 히나타를 향했다. 하지만 "토스 가져와!!!!" 라고 외치며 힘차게 뛰어오른 히나타는 정작 그 토스에 손가락 끝도 대지 못한 채 폴짝, 코트 위로 무사히 착지했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히나타와 얼이 빠진 듯한 타나카 선배와 다른 선수들 사이로 츠키시마가 못견디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왔다, 제왕의 토스!"
빠르기만 하면 되나? 왕님의 중학교 팀 메이트는 어떻게 그런 독재를 참았나 몰라! 굳어져 어쩔 줄 모르는 선배들 사이에서 진심으로 즐겁게 웃으며 말하던 츠키시마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아, 그건가?
"못 참았으니까 중학교 마지막 경기를 '그렇게' 끝낸 건가?"
"!!!"
부싯돌이 던져지고, 불꽃이 타올랐다. 안 돼. 여기서는. 폭주하기 시작한 센티넬 에너지가 푸른 아지랑이가 되어 일렁거렸다. 귓속에서는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리고 누군가가 머릿속을 날카로운 꼬챙이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아파. 괴로워. 해방시켜 줘. 심장을 태우는 불꽃을 내보내면 살 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카게야마의 이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츠키시마였다. 아까와 같은 반응이 아니다. 츠키시마의 비웃음이 멎은 것을 본 다른 부원들도 그제서야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카게야마?"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굉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내보내 달라는 듯 온 몸을 감싼 푸른 아지랑이가 거세게 타올랐다. 카게야마는 비명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는 검푸른 눈동자에서 불이 쏟아졌다. 조금만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센티넬 에너지가 폭주할 것 같았다. 금세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판단이 흐려진 머리가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그때, 굉음에 묻히지 않는 청량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그리고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센티넬과 가이드. 이형능력체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가설과 추측이 난무할 뿐 정설이랄 것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초능력에 해당하는 능력들이 이형능력체의 특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연구결과와 방사능에 의해 변형된 유전자가 발현되면서 이능을 갖게 했다는 식의 SF판타지 소설 같은 가설이 한묶음이 되어 떠돌았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이것이었다. '이형능력체의 탄생은 크리처의 발생과 궤를 같이 한다.'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공포와 범지구적 통합을 가져다 준 존재들.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의 끝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늘을 울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열리는 게이트에서는 원재료를 짐작할 수도 없는 해괴한 합성생명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통의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센티넬들이 크리처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전 세계 각국에 CIAS의 센터가 세워지고, 각 나라별로 센티넬과 가이드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자 주요 병력으로 자리잡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하지 않습니까. 크리처는 몬스터로 잡는 게 맞지요."
"센티넬도 크리처의 일종이라는 말씀인가요, 그거."
입 조심하세요. 센티넬 특별법이 통과되기 직전인데, 관계자의 입에서 그런 발언은 시기상 좋지 않아요. 야마모토의 엄중한 주의에 제2이형능력체 연구소장 아사노 히로아키가 장난스럽게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자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옅은 한숨을 내쉰 야마모토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겁니다. 그 애는 진짜 괴물이에요. 한계치 측정 실험때마다 기계를 부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측정치를 더 높인 기계를 들여와요. 그러면 또 그애가 기계를 부수고, 우리가 또 다른 기계를 가져다 놓습니다. 이건 뭐 도장깨기 같은 기분이라 사실 좀 흥분되기까지 하네요."
즐거운 듯이 이어지는 아사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야마모토는 더욱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두달 전의 측정치로 카게야마는 SS+급의 센티넬이 되었다. +가 붙은 이유는 제2 이형능력체 연구소의 측정장비가 도출해낼 수 있는 한계점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오이카와 토오루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각성 당시 오이카와의 등급은 B. 단, 위기상황에서는 AA급이었다. 그리고 센터에 등록되어 임무를 맡은 지 5년차인 지금의 등급은 S. 본래 타고난 능력의 한계를 넘어 갈고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그릇에 한계가 있는 센티넬에너지라면 난이도는 수직상승한다. 하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 힘으로 한계를 넘고 그릇을 넓혔다. 모든 것은 자신의 가이드를 지키기 위해. 오이카와는 학계에 희귀 케이스로 등록될 만큼 능력을 쌓았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등급도, 그의 가이드와의 동조율도 월등히 높은 센티넬이 나타났다. 누구보다도 질긴 인연을 가진, 그의 두 학년 아래의 후배가.
'...어떻게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쉴 새 없이 카게야마의 능력치에 대해 보고하는 아사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야마모토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3. 또 다른 세계-1 (드림주 루트)
손가락 두 개를 맞부딪힐 때 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방금 전까지 옴짝달싹 못하게 그녀를 잡아채고 있던 팔이 팬터마임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풀렸다. 재빨리 Y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뒤를 돌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괴한의 얼굴은 온통 붉고, 온 몸의 근육들이 긴장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이 금방이라도 다시 그녀를 붙잡을 것만 같아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누군가가 뒤에서 단단히 붙들었다. 남자가 찢어놓은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 어깨에 닿는 미적지근한 온도가 소름끼쳤다.
"...싫어!!"
발작적으로 닿아온 손을 떼어내려는 그녀의 어깨에 옷가지인 것 같은 천이 덮이고, 그대로 가볍게 끌어당겨졌다. 사락사락하는 결이 좋아서 장난삼아 쓰다듬다가 끝내 헝클어뜨리곤 했던 익숙한 색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그녀의 반항이 멎었다. 평소 쾌활하다 못해 개구지다는 평을 듣는 오이카와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목덜미와 귓가에 내려앉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토오루쨩?”
“응.”
많이 놀랐지? 달래는 듯 토닥거리는 손에 그녀는 완벽하게 안심하고 정신을 놓았다. 오이카와는 힘을 잃고 늘어진 그녀를 고쳐 안아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살짝 웃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아직까지도 죄여있는 채인 Y를 향해서도 씨익 웃어보였다. 아직 어린아이의 태가 남아 있는 해맑은 웃음의 끝에 진홍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불꽃을 두른 오이카와가 Y를 향해 말했다.
“폐품 주제에 내 가이드를...”
딱, 경쾌한 소리가 울릴 때 마다 오이카와에게 제압당한 Y가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목의 핏줄이 불거지도록 입을 쩍 벌려대는 것이 퍽 괴로운 모양이었지만, 조용한 아오바 구의 주택가 골목에는 오이카와가 일정한 간격으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센티넬의 그릇을 재는 것이 파장과 이능이라면, 가이드의 그릇을 재는 것은 동조율과 안정도이다. 동조율은 가이드와 센티넬의 상성을 나타낸다. 동조율이 높은 페어일수록 센티넬의 이능은 증폭된다. 현재 등록된 페어 중 가장 동조율이 높은 페어로 알려진 예는 독일의 쌍둥이 형제로, 95.2%의 동조율을 보였다고 한다. 카게야마와 그녀의 페어가 정식 등록될 경우 세계 학계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안정도의 경우는 센티넬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흥분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통칭 리바운드-을 가라앉히는 능력에 대한 척도이다. 현행 이형능력체 관련 법령에 따르면 미성년 센티넬과 가이드 페어는 둘 중에서 나이가 어린 쪽이 성년이 될 때까지 과도한 신체적 접촉을 통한 리바운드 안정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일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각인 절차도 성년 이후에 진행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어린 센티넬과 가이드들에게 조금 더 적합한 페어를 매칭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각인 이후에는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떨어뜨릴 수 없으니까. 어쨌든 성년 이전의 임시 페어는 언제든지 센터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쿠니 아저씨. 지금 이 설명, 오이카와에게는 말 못했죠?”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에 야마모토 쿠니히로가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의 가이드인 그녀는 얼핏 얌전하고 기가 약해 보였으나, 그 오이카와 토오루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에 넣고 휘두르는 권력자였다. 센터 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소녀가 알겠다는 듯 웃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카게야마라 더 질색할 거예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왠지 문제아에 대한 보호자 상담시간 비슷한 형태로, 야마모토는 그녀에게 오이카와가 이형능력체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단으로 묶어 혼절시킨 사건을 추려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뭐, 자네도 가이드로써 알고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말해주는 거니까. 응응, 절대 일러바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한껏 곤란한 얼굴이 되어 야마모토에게 거듭 사과를 한 그녀가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제가 설명할게요.”
“......정말?!”
갑자기 불이 켜진 듯 환해지는 야마모토의 얼굴에 그녀가 웃었다. 네. 제가 데려왔으니 책임을 져야죠. 그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한시름 놓은 듯 야마모토도 미소를 보냈다. CIAS 센다이 지부장 집무실의 테이블에서 이루어진 쾌거였다.
4. 독백 (카게야마, 오이카와 루트)
카게야마가 CIAS의 정식 센티넬로 등록된 이후 가장 바빠진 사람들은 제2이형능력체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과 CIAS 센다이 지부의 대 크리처 전투훈련용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엔지니어들이었다. 2연 연구소장인 아사노는 카게야마가 한계치 측정 기계를 망가뜨렸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도쿄의 1연에 전화를 걸어 자랑인지 투정인지 구분이 애매한 말들을 쏟아냈다. 이래저래 오이카와와 함께 센터에 들락거린지 수 년 째였던 그녀는 날카로운 무테 안경 너머로 사람을 재단하듯 빤히 바라보던 아사노 소장이 의외로 쉽게 뜨거워지는 타입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센다이 센터 내에서 카게야마와 그녀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등록된 지 2개월이 다 지나도록 아직 한계치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SS+레벨을 받은 센티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의 중심이 될 만 한데, '그' 오이카와의 가이드가 발현하자마자 데려왔는데다가 둘의 동조율이 99%라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순식간에 센다이 센터의 핫이슈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의 경우는 이미 오이카와와 함께 센터의 문을 열었을 때부터 온갖 시선과 수근거림에 익숙해져 있었다. 센티넬 범죄의 희생자. '몬스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가이드.
가이드의 수가 센티넬의 수에 비에 턱없이 모자라게 된 최근에는 한 명의 가이드에게 동조율과 레벨이 비슷한 여러 센티넬을 페어로 묶어 두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녀는 특이 케이스로, 오이카와 이외의 센티넬과의 동조가 원활하지 않았다. 센터 내의 어떤 센티넬과도 50% 이상을 넘지 못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의 (임시)센티넬인 오이카와가 다른 센티넬의 페어 연결을 무조건 거부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웃는 얼굴로 "동조율이 수십퍼센트나 차이나는데, 설마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페어 연결을 하시겠다는 건 아니죠?" 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오이카와를 마주한 센터의 관계자들은 "우선 두 사람 모두 성인이 되고 나서 페어 구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유예를 두었었다.
"카아게에야마아구운!!!!!!!! 여기 있어?"
"네!"
"찾았다!"
"자, 가는거야! 이번에야말로 카게야마군의 한계치까지 끌어 내 보이겠어!"
"...?!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가자고! 요즈음 줄곧 약간의 흥분상태를 보이는 2연의 연구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카게야마를 둘러싸고는 밀고 당기며 실험동으로 이동했다. 카게야마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끌려나가다가 그녀를 보고 다녀오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연구원들이 이렇게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건 오이카와가 S레벨로 등급을 올렸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한계치 실험이 끝나면 저녁 연습에 합류해야 되니까 되도록 빨리 카라스노로 돌아가야 한다. 센터의 휴게실에 앉아 이동에 걸릴 시간과 카게야마의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맹렬히 생각중인 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온기가 느껴졌다.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만 같은 센티넬 에너지가 느껴졌지만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눈 녹듯이 파장이 안정되었다.
"아-아...오이카와 씨 이제야 살 것 같아..."
"토오루쨩, 오늘 정기검사였던가?"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의 몸이 살짝 굳었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글쎄- 야마모토씨가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간지럽다고 손을 들어 밀어내는 그녀의 손에 되려 머리를 부비며 오이카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혀 쓸모없는 말만 했다니까? 그 아저씨."
"무슨?"
"토비오쨩이 한계치 측정 기기를 여섯 대 째 부수었다던가, 시뮬레이션 F-13의 러닝타임을 30분대로 끊었다던가. ...생각하니까 열받네. 난 그거 한 번 실패하고 두번째에 러닝타임 150분으로 끊었는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크으윽, 하고 분해하는 오이카와를 그녀가 살살 달랬다. 시뮬레이션 F는 대 크리쳐 섬멸전의 시뮬레이션으로, 시가지에서 진행되는 실제 전투를 가정하고 트레이닝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그중에서도 13번째 시뮬레이션인 F-13은 센티넬들 사이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S급 이하 센티넬들에게는 실행 허가조차도 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시뮬레이션 구동 첫 날에 다섯 개의 시뮬레이션 러닝타임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래서 토비오쨩이 싫다니까!" 연신 툴툴거리는 오이카와를 달래느라 그녀는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헤집어놓다시피 하며 쓰다듬었다. 평소였다면 세팅이 망가진다며 질색을 했을테지만 꽤 상태가 좋지 않았었는지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센티넬에게 있어서 가이드와의 접촉은 언제 어떠한 상황이라도 기분 좋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니까. 원래 그렇게 설계된 존재들인 것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그녀가 생각했을 때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아까까지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모두 지운 오이카와가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자, 센티넬 에너지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너를 토비오와 공유하라고 협박했지.'
떠올리기만 해도 뱃속이 뒤틀릴 것 같지만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다. 가이드와 센티넬의 관계에서 갑과 을을 구한다면 절대적 갑은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미쳐 죽을테지만,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센티넬과 얽힌 가이드들의 평균수명이 더 짧을 정도로 가이드가 아닌 개인의 인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원한다면... 오이카와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카게야마의 등장 이후로 오이카와는 자신이 센터의 관계자들에게 했던 말들을 돌려받고 있었다.
[둘을 한 페어로 묶기에는 동조율이 너무 차이나지 않아? 카게야마와는 99%라며.]
[애초에 가이드를 독점하려는 게 말이나 돼? 아직 두사람 다 학생이라서 지부장도 봐 주는 거였잖아.]
[그러고보니 각인도 아직이라며? 그럼 정식 페어도 아니잖아?]
인정하긴 싫지만, 결국... 최후에는 카게야마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지는 않다. 내 가이드인데. 너는, 처음부터 이 오이카와 토오루의!
"선배, 다녀왔습니다."
"아, 고생했어. 카게야마, 이번에는 기계 무사해?"
"......아니요."
"저런. 아사노 씨가 좋아하시겠네."
토비오!
오이카와는 감히 제 가이드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그녀와 이야기하던 카게야마는 적의 가득한 오이카와의 파장과 시선을 인식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센티넬 특유의 호전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탓에 넓지 않은 휴게실 안은 곧 두 사람의 붉고 푸른 센티넬 에너지가 맞부딪히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5. 백허그 (카게야마, 오이카와 루트)
"정말, 센티넬은 다 멍청이들이야!"
"...죄송합니다."
뇌세포가 죄다 전투신경으로 변환된 거야? 왜 눈만 마주치면 싸움질이야? 그녀는 맹렬히 화를 내며 해질녘의 시내를 걷고 있었다. 전철에서 내린 이후부터 카게야마가 따라오는지 마는지 확인도 않고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씨근댔다. 오가는 사람들이 정수리에서 김을 뿜을 듯 화를 내며 인도를 질주하는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는데도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드물게도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뒤를 밟았다.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옆으로 붙지도 못했지만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보카와!, 카게야마!"
그녀의 외침도 이미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두 사람의 센티넬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붉고 푸른 파장이 충돌할 때 마다 불티가, 때로는 수증기가. 어느 때에는 전기 에너지의 스파크가 튀었다. CIAS내의 모든 시설은 일정치 이상의 센티넬에너지를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압축된, 상해의 의도가 가득한 파장이 몇번이고 부딪히자 휴게실의 강화유리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주위로 불길한 파열음이 점점 볼륨을 키워가고 있었는데도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서로를 마주보고 선 채 눈빛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때 유리 조각 하나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며 그녀의 뺨을 스쳤다. 얼굴을 스치는 따끔한 감각에 그녀가 작게 비명을 지른 것과 동시에,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유리벽이 산산히 조각났다.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예쁜 색으로 코팅된 휴게실의 창문이 반짝거리는 작은 조각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의 센티넬에너지를 견디지 못한 유리는 가늘고 작은 비늘 모양으로 잘려 센티넬 에너지의 방향을 따라 휘몰아쳤다. ...저거, 맞으면 아프겠지. 그녀는 눈을 감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쏟아지는 유리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빛이 눈동자에 반사되었다.
...이게 뭐야. 가이드라며. 지켜야 하는 존재라며. 바보야. 그녀는 침착하게 바늘 수십만 개가 전신에 박히는 아픔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유리조각들은 그녀의 주위를 흐르기만 할 뿐 그녀를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인 그녀가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 주위로 붉고 푸른 센티넬에너지가 일렁이며 그녀를 감싸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 파장의 밖에는 엉망이 된 휴게실의 집기들과 함께 수백만개의 유리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를 향해 마주선 두 명의 센티넬은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일단 눌러둔 후, 센티넬에너지 방출에 의한 사고를 수습하고 있었다.
"토비오쨩, 집중이 흐트러졌어. ...아직 컨트롤이 서툴구나?"
"...오이카와 선배야말로 조심하십시오. 지금 오이카와 선배와 저, 둘 중 한명이라도 힘의 균형이 깨지면... 선배의 안전이 위협받습니다."
"그런 거, 토비오쨩이 말하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거든?"
숨막힐 듯 실내를 채우던 파장이 아주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센티넬에너지의 특성상 방출하는 것보다 갈무리하는 쪽이 몇 배는 더 어렵다. 게다가 두 사람의 파장이 완벽하게 같은 비율로 대립하지 않는다면 단번에 균형이 깨져 유리조각의 폭풍이 불게 될 것이다. 그녀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가 두 사람의 집중이 깨어질까 싶어 가만히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아주 서서히 광풍이 가라앉았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두 사람의 전신에서 3세트 연속 경기를 다섯 번쯤 마친 것 같은 피로가 묻어났다. 땀방울들이 이마에서 눈썹을 지나 옆얼굴을 흐르며 턱끝에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두 사람이 방출한 센티넬 에너지를 모두 거두어들이자 휴게실에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원과 그 주위에 흩뿌려진 색색의 유리조각들만이 남았다.
"후우....."
이상을 느끼고 달려온 센터의 직원들과 연구원들의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것을 들으며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아 큰 숨을 내쉬었다.
"말렸잖아! 그만 하라고 했잖아! 내가 네 가이드라며!"
동조율이 얼마든, 언제부터 페어로 함께했든 아무 소용 없었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싸우는 게 좋으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싸우다가...! 그녀는 이 끝을 모르는 분노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이 분노의 목적지가 카게야마나 오이카와가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뱃속 깊은 곳이 끓어올랐다. 신호는 아직 붉었지만 통행하는 차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인도와 횡단보도를 가르는 경계를 지나 흑백의 선이 뚜렷한 곳으로 한 발짝 다시 내딛었을 때였다.
"선배!"
턱, 하고 팔을 잡히고 그대로 허리를 지나 반대편 팔까지 단번에 잡아채였다. 키에 비해 많이 말라서 블로킹 연습 때에는 츠키시마 다음으로 불안해 보였는데, 겉보기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단단한 팔이 강하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충돌을 면한 트럭이급히 속도를 줄였다가 백미러를 확인하는 듯 하더니 다시 속도를 내어 교차로를 지났다. 카게야마가 놓칠까 두려운 듯 그녀를 당겨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속도를 낸 그녀를 따라잡느라 흐트러진 목소리가 어깨 너머에서 들려왔다.
"...조심, 하십시오."
신호도 보지 않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안심한 듯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카게야마가 말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등 뒤에서 말해 오는 남자. 누구지? 센티넬. 남자....센티넬!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이 굳었고, 곧 잡혀있는 팔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놔!!! ...ㄴㅘ, 주세..요. 제발! ...잘못,했..."
카게야마가 깜짝 놀라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압박이 풀리자마자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내쉬며 울기 시작했다.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한없이 무력한 모습으로 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카게야마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눈 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센터의 휴게실, 마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오이카와 선배와, 그런 오이카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짓던 선배의 모습. '역시 그 사람처럼은, 안 되는 것일까...' 씁쓸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아직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 흩어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달래기 시작했다.
6. 희망고문 (카게야마 루트)
올해 최고의 이슈는 단연 카게야마 토비오의 트리플S급 타이틀 제패였다. 그녀가 카게야마를 이끌고 센터의 문을 열었던 그 순간부터 반년이 넘는 술래잡기 끝에 미국 센티넬 커멘드 센터의 인력까지 동원된 후에야 겨우 내려진 결론이었다. 공식적으로 SS급 이상의 센티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 규격 외 센티넬을 분류하기 위해서 전일본이형능력체 제2연구소, 통칭 2연의 거의 모든 연구원들이 매달리다시피 하며 카게야마의 한계치 측정을 위해 밤낮을 불살랐다. 처음엔 2연의 모든 것을 낮설어하고 중간에는 한계치 측정 기기와 엉뚱한 경쟁심리가 붙었던 카게야마는 연구원들 사이에서 자신을 오이카와 토오루에 이어 ‘몬스터2’ 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녀를 괴물들을 거느리는 ‘마녀’ 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이른 겨울, 열일곱 번째 한계치 측정 실험에서 처음으로 기계가 고장나지 않았음에도 측정을 멈추었다.
“...카게야마 군?”
기록 화면을 바라보던 수석 연구원 마츠이 유카가 의아하다는 듯 모니터 너머의 카게야마를 불렀다. 센티넬 에너지를 흡수, 분해시키는 특수 유리라지만 이미 카게야마의 손짓 한 번에 열여섯 번 쯤 박살이 났었다. 첫 번째 실험에서 기기 뿐 아니라 실험동 전체를 날려버릴 뻔한 카게야마는 두 번째 실험과 세 번째 실험을 지나면서 놀라운 속도로 날뛰는 에너지를 제어하는 법을 익히는 동시에, 효율적으로 한계치 측정기기를 망가뜨리는 법을 익혔다.
한 번은 빨리 끝내고 봄의 고교배구 예선전 대비를 위해 연습을 하러 가 봐야 한다며 구형의 측정기기에 손을 대자마자 강화유리를 녹여버리고는 그 녹인 강화유리로 배구공 모양을 만들어 놓고 멀뚱멀뚱 서 있기도 했었다. 실험동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마츠이를 비롯한 카게야마 전담팀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실례했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라고 꾸벅 인사를 건넨 후, 씩씩하게 밖으로 나갔다. 연구원들은 5중의 잠금장치와 충격 방지 처리가 된 실험동의 문을 여닫이문처럼 열고 나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를 잡고 웃었었다. 그러나 오늘의 카게야마는 무언가 달랐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구형의 측정기기에 손을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니터룸의 미국 측 관계자가 가만히 내뱉는 탄성이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마츠이가 다시 카게야마에게 질문했다.
“카게야마 군. ...최대로 개방해 볼까요?”
“저... 죄송합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구체에서 손을 뗀 카게야마가 움직임을 보이자, 모니터룸의 마이크가 점등되며 카랑카랑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Ms Matsui. 무슨 일이죠?]
[그가 측정을 거부했습니다.]
[센티넬을 설득해서 실험을 속개하도록 하세요. 이번에야말로 데이터가 나올 겁니다.]
모니터룸의 지시에 마츠이가 다시 실험동과 연결된 마이크를 켰다.
“카게야마 군, 괜찮나요?”
“그만... 하겠습니다.”
“카게야마 군.”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등급이 정해지면, 카게야마 군의 가이드가 정해질 겁니다. 아마도 카게야마군을 세이프가이딩 한 그 가이드가 매칭될 겁니다. 마츠이의 입에서 나온 그녀의 이름에 카게야마가 반응했다. 순간 치솟는 수치에 모니터룸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에서 푸른 불길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선배는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 선배에게는, 오이카와 선배가...
카게야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마츠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 가이드는 현재 오이카와 토오루와 임시 페어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둘 다 미성년인 관계로, 아직 각인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더 강하고, 동조율이 높은 쪽과 페어를 구성할 수밖에 없겠지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마츠이의 목소리가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검푸른 눈동자에서 불이 쏟아졌다.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은 카게야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어 센터와 모니터룸이 연결된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게야마가 측정기기 쪽으로 손을 뻗은 것과 동시에 파괴음과 함께 카메라 연결이 끊어졌다. 지직거리는 화면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측정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연구원들과 관계자들이 실험동에 도착했을 때 이미 카게야마는 사라진 후였고, 카메라가 연결된 전면부에는 한때 한계치 측정 도구였던 덩어리가 깨끗하게 녹은 후 동그란 구 모양으로 만들어져서는 정확히 카메라 부분에 반쯤 박혀 있었다. 고교 배구부에서 세터를 맡고 있다더니. 나이스 토스로구만. 누군가의 한탄과 같은 한 마디에 주변의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일렁거린다. 눈 안의 불이 사라지지 않아 카게야마는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검푸른 불꽃을 풀무질했다.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수근대는 목소리. 힐긋거리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혐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흔한 적개심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폭주하기 시작한 파장을 억지로 잡아 끌어당기며 카게야마는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먼저 발걸음이 움직였다. 복도를 지나 몇 개인가의 건물을 통과해 두텁고, 어째서인지 물기가 있는 유리문을 열자
그녀가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날뛰던 파장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에는 있을 리 없는 여리고 부드러운 초록색 잎들. 나무와 꽃이 우거진 그늘 아래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가 놀란 듯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무슨 일이야.”
너, 파장이... 벌떡 일어나 카게야마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다짜고짜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선배,그, 저기... 괜찮습니다! 이제... 고장난 테이프같이 중얼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늘 아래 의자까지 끌려 간 카게야마가 그대로 의자에 앉혀졌다. 그녀는 카게야마의 고개를 젖히고는 그대로 이마와 눈 사이에 손을 얹었다.약간 서늘하고 건조한 손이 그저 닿았을 뿐인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불꽃을 풀무질하던 심장이 차분해지고 눈 안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금세 편안히 숨을 내쉬는 카게야마에게 그녀가 말했다.
“한계치 측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네.”
“그럼, 카게야마도 가이드 매칭을 하겠구나.”
“...네.”
다시 말이 없어진 그녀가 카게야마의 눈과 이마 사이에 있던 손가락을 불편한 듯이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센터의 대기실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 있던 오이카와 선배와 그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의 움직임에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살피는 느낌이 나더니, 이번에는 손이 이마 위로 올라왔다. 온실 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공조 시스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락거리며 잎사귀들을 흔들고 지나갔다. 카게야마의 입술 안쪽에서 소리가 되지 못하는 말들이 맴돌고 있었다.
선배. 오늘 한계치 측정 기계를 또 망가뜨렸습니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한참 시끄럽게 말했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연에서는 선배와 저를 매칭할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오이카와 선배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아무리 선배와 제가 동조율이 높다고 해도, 선배는... 오이카와 선배가 아니면 안 되니까... 제가 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래도... 선배.
“...한번만 제게 거짓말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흘러나온 말에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가락이 이마를 간질이던 검은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그 간질거리는 움직임에도 카게야마는 꽉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카게야마. 나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을 거야.”
그리고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우선, 지금은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고생 많았어, 카게야마.’
무심코 마음이 아파올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잠에 빠진 카게야마가 깨어날 때까지 잠시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7. 파트너
정교하게 만들어진 하늘에 뿔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재난대책본부의 대피 방송과 함께 건물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비명과 폭발음을 들으며 CIAS 시뮬레이션 엔지니어팀의 장인정신에 감탄하는 동시에 진절머리를 냈다.
‘아무리 실전 대비 시뮬레이션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렇게까지 극사실주의일 필요가 있어?’
도저히 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생긴 생물이 날아다니며 여섯 개의 날카로운 앞발로 사람들을 꿰차고 수직 상승했다. 날개…로 추측되는 부분이 퍼덕일 때마다 썩은 달걀 같은 회백색 점액질이 뚝뚝 떨어졌다. 점액질은 닿는 모든 것을 녹이며 푸른 연기를 내뿜었고, 아직 크리쳐의 앞발에 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누가 기관에서 만든 시뮬레이션 아니랄까봐 몇개 무리의 사람들은 생화학무기 대비용 방독면을 착용하고 지정된 대피장소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섬멸전이 아니라 대민구호 시뮬레이션이었나? 잠시 후 시작될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던 오이카와의 눈앞에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뒤이어 대피소에 모여 있던 사람들로부터 방독면을 뚫을 듯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지금부터 시뮬레이션 T-0의 알파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오이카와, 준비 됐어?]
“무라쨩, 이거 무슨 악취미야? 무라쨩 취향?”
[괜찮았어? 아무리 시뮬레이션이라도 너무 긴장감이 없으면 능력 발현이 힘들다는 의견이 있어서…]
오이카와의 핀잔에 시뮬레이션 T 프로젝트 팀장 무라카타 키요시가 묘하게 수줍음이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 진짜 매드 사이언티스트들 다 죽었으면. 이놈이나 2연의 아사노 소장이나 똑같은 놈들이다. 오이카와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하는 무라카타를 무시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진홍의 불꽃에 둘러싸인 오이카와가 나른하게 웃어보였다.
“무라쨩, 브리핑.”
[…오늘 테스트는 비행형 크리쳐 12구에 의한 시단위 피해에 대하여 크리쳐 섬멸 및 대민구호활동을 가정한 것으로, 2인 1조로 이루어집니다.]
“2인 1조? 그런 말 없었잖아?”
[네가 말 할 기회를 안 줬잖아요, 이 성질 급한 센티넬아. 어쨌든, 카운트다운 끝나면 저쪽이랑 연결될테니까 충돌 주의하고. 오늘의 목표는.]
-단 한 명이라도 살릴 것.
카운트다운 동안 어두워진 주변을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연신 눈을 굴렸다. 2인 1조라니? 센터의 모든 시뮬레이션은 기본적으로 1인용이다. 센티넬이란 것들은 본래 자기 능력에만 의존하는지라 협업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이어서, 모든 작전은 지역을 분할하여 자기 지역은 담당 센티넬이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를 위한 훈련용 시뮬레이션 역시 1대 다수의 크리쳐 섬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왔고.
‘그런데 갑자기 왜…?’
차츰 주위가 밝아지며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라니. 역할을 나누어야 되나?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그 녀석의 특성에 맞추어서 뭘 해보든가 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카운트다운 종료와 함께 눈을 뜬 오이카와는
“…??? 안녕하십니까 오이카와 선배!”
“무라쨩! 나 안해!”
크리쳐들이 산만하게 날아다니며 시가지를 부수며 사람들을 던지고있는데도 오이카와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인사를 건네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보고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컨트롤센터에서는 답이 없었다. 튀었구만. 오이카와는 일단 테스트를 끝내고 나서 무라카타를 잡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려면 먼저 이것들을 잡아야 되는데… 생각에 빠진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설정된 대피구역은 모두 네 곳으로, 현재 생존자가 있는 포인트는 두 곳입니다. 위치는…”
“잠깐잠깐, 토비오쨩, 왜 두 곳이야? 아까 있던 저쪽은…”
그쪽은… 카게야마가 드물게도 말을 흐리는 사이, 또 다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독면을 쓴 채로, 옆구리 아래로 온전한 부분이 없는 타케루 나이 또래의 소년. 오이카와는 그제서야 왜 목표가 “단 한명이라도 살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들의 머리 위 상공에는 방금 소년을 떨어뜨린 크리쳐 하나가 선회하며 끼룩거리고 있었다. 어디가 목인지도 모르게 생긴 주제에! 오이카와의 파장이 거칠어지는것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오이카와 선배!”
“비켜! 시간 없다니까?”
으르렁거리는 오이카와와 대치한 카게야마가 물러나는 대신 오이카와의 뒤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뒤를 돌아본 오이카와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네 짓이야?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가 링크되기 전에 먼저 처리해둘까 하고 잡았는데… 저 녀석들, 죽기 전에 생명반응이 있는 곳을 찾아가 자폭합니다. 첫번째 대피소가…….”
“알겠어. 그리고 그 와중에 두 번째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은 나머지 녀석들이 잡아 채갔다는 거지?”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굳은 채인 얄미운 후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열도 유일의 트리플 S급 센티넬님께서 저런 얼굴이라니. 실전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시뮬레이션이라고는 해도 인명피해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뭐야. 토비오쨩, 제법 정의의 히어로 같잖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등짝 한가운데를 사정없는 스윙으로 후려쳤다. 현역 배구부 주장이자 무시무시한 점프 서브를 날리는 오이카와의 파워를 한몸에 받은 카게야마는 얼굴을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뭡니까, 갑자기. 오이카와는 일부러 더욱 삐딱하게 말했다.
“신경쓰지 마. 시뮬레이션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자, 그럼 이제 슬슬 저것들을 몰아넣어 볼까?”
“…넵.”
작게 대답한 카게야마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때,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통신이 CIAS의 컨트롤센터와 연결되었다. 뭐야, 무라쨩! 내가 그만한다고 할 때는 연결 끊어버리더니! 오이카와의 장난스러운 말이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의 목소리로 끊겼다.
[추가 안내 사항을 알려드립니다. 상해의 위험이 높은 본 알파테스트의 특성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가이드를 시뮬레이션에 투입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테스트의 목표를 수정합니다.]
- 가이드를 보호하며 크리쳐를 섬멸할 것.
- 대피구역 4, 연결이 확인되었습니다.
통신의 끝과 함께 진홍과 암청의 파장이 부딪히며 타올랐다. 두 사람의 센티넬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하늘 위를 무리지어 이동하는 크리쳐와 함께 고통에 울부짖는 무수한 환영을 지나며 대피구역 4로 향했다.
8. 손 뻗으면 닿을 거리
"왜 오이카와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컨트롤센터의 대형 화면에는 오이카와가 있는대로 왁왁거리며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한가득 띄워져 있었다.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카게야마를 한 번, 자신을 한 번 가리키고는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팔을 교차해 엑스 표시를 몇번이고 그려 보였다. …오디오가 차단되어 들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CIAS센다이 지부장 야마모토 쿠니히로는 당연한 소릴 묻는다는 듯 모니터룸 지휘석에 앉은 무라카타에게 답했다.
"그야, 반응이 저런 걸… 말해줬으면 절대 안 한다고 했을 텐데?"
지난번에 한번 불러서 카게야마 군의 시뮬레이션 성적만 넌지시 말해봤는데 표정이 영 좋지 않더라고. 그런 상황에서 2인 1조의 테스트 파일럿을 하라고 떠밀면 이번엔 휴게실의 스테인드글라스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걸?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나. 평온한 말투와 인자한 웃음이었지만 무라카타는 속이 편치 않았다. 화면 너머의 입모양만 봐도 수신자가 명확한 욕설이 7.1채널 돌비 사운드로 재생되는 것 같다. 옆자리에서 모니터링 중이던 T 프로젝트의 치프 디자이너 코다마가 무라카타의 뱃속에 불편함을 더하는 말을 남겼다.
"토오루쨩이, 나가면 무라카타 팀장님 가만 안 둔대요."
"어이쿠, 자네 큰일났구만."
"왜 저만?? 지시한 건 지부장님이시지 않습니까?”
"브리핑을 제대로 안 한 자네의 탓이지."
이러시깁니까! 부당업무지시로 고발할 거예요? 시끌시끌해진 컨트롤센터의 한쪽 구석에서 부활동 일지를 기록하던 손길이 멈추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임시 가이드인 그녀가 휴대전화를 건드려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하의 억울함을 방관하며 빙글빙글 웃는 야마모토에게 질문했다.
“쿠니 아저씨. 테스트는 언제 끝나나요? 둘 다 내일 시합이 있어서…”
일찍 집에 보내야 될 것 같은데요. 마치 체력 테스트가 언제 끝나냐는 듯한 말투에 야마모토는 으레 눈가에 걸던 가짜웃음 대신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학계의 진귀한 연구대상도, 열도 유일의 트리플 S급 센티넬도 그녀에게 걸리면 그저 평범한 운동부 남고생이다. 국가 소유의 대 크리쳐 살생병기와 평범한 고교배구선수라는 간극. 야마모토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양립하기 힘든 생활을 별 일 없이 유지할 수 있도록 이 소녀가 어떠한 선택을 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그러했듯 이 테스트가 언제 끝나는지 또한 오로지 두 사람의 임시 가이드인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자네가 아주 약간 협조해 준다면 두 사람 다 저녁 연습에는 참가할 수 있을 텐데…”
“할게요.”
“저런, 큰일나요. 조건도 듣지 않고 못된 아저씨가 하자는 대로 덥석 대답하고 그러면,”
“쿠니 아저씨나 여러분들이 그러실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 바보들에 대한 거라면 제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요. …맞지요? 동의를 구하며 웃어보이는 그녀에게 무라카타와 코다마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참가하는 줄 알았다면 그래픽을 조금 조절해둘걸 그랬나 싶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시뮬레이션 동으로 걸음을 옳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컨트롤 센터 내의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이제… 이 자리의 누군가는 저 괴물들에게 자기 가이드가 시뮬레이션 테스트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잖아?’
굳어있는 공기를 깬 것은 야마모토 지부장이었다.
“자, 가이드 투입 안내 합시다… 자네, 어디 가나?”
“저는 못합니다!!!”
진짜로 오이카와한테 살해당한다구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냉정 단호하게 거절하는 무라카타를 보며 야마모토는 그만 정신적으로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
계기는 센다이 CIAS 지부 휴게실 반파 사건이었을 것이다. 두 센티넬의 파장 충돌에 의한 센티넬 에너지 대량 방출. 보통의 센티넬 사고였다면 휴게실 반파가 아니라 센터 시설 파괴 및 다수의 인명피해가 뒤따를만한 규모였음에도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서로의 파장을 맞추어 가며 센티넬 에너지 방출을 수습해냈다. 주위를 지나던 직원 몇이 경미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중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 특히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그들의 임시 가이드에게는 뺨에 살짝 긁힌 자국 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았다.
그 날, 모여들어서 비명과 환호를 동시에 올린 연구원들에 의해 T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기본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센티넬을 이용한 크리쳐 섬멸전의 문제점 -센티넬이 전투본능에 몸을 맡긴 나머지 시가지 파괴 및 민간인 피해에 둔감해진다- 을 보완하는 동시에 센다이 지부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오른 ‘세 사람’의 관계 개선을 꾀할 수 있는 묘안이었겠지. 그러니 쿠니 아저씨가 나서서 내게 협조를 요청한 것일 테고. 시뮬레이션에 접속하는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부적 대신인가.’
어차피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그녀가 부상을 입거나 할 염려는 없다. 아마도 그녀가 투입되는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의 파장에 상처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겠지. 그나저나 이 바보들, 빨리 끝내겠다고 무턱대고 두들겨 패다가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카운트다운의 종료와 함께 눈을 뜬 그녀의 눈앞에서
“…선배. 왜, 들어오신 겁니까?”
“너,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무라쨩? 야마모토 씨?”
얼굴이며 윗옷에 땀이 흥건해지도록 달려 온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씩씩거리며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멀게 보이는 정교한 도시의 하늘에는 괴상하게 생긴 크리쳐가 날아다니고, 주변에서는 쉴 새 없이 사람들의 비명과 폭발음이 들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왜 들어왔는지, 누가 시켰는지, 몸은 괜찮은지(다시 말하지만 시뮬레이션, 가상현실이다), 를 번갈아가며 묻고는 이미 끊겨버린 통신을 향해 그녀를 내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안내 직원의 말로는 그녀가 접속된 포인트는 두 사람의 접속지점에서 꽤 멀게 설정되어 있다고 했었는데…
그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양 손을 들었다. 마침 두 사람 모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선배…?”
“??왜 그래?”
길이의 차이 덕분에 포옹이라기보다는 매달림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지만 어쨌든 웃겨 죽겠는 얼굴은 숨길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다 불안정했던 두 사람의 파장이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에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녀는 혓바닥 밑에 남은 웃음기를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얼른 끝내고, 저녁 연습하러 가자.”
“…넵!”
“오이카와씨는 집에 갈 건데?”
“그럼, 우유빵 사줄 테니까 먹고 가.”
좋아. 그럼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 선배, 나오지 마십시오. 알았지? 몇번이고 다짐을 받은 두 사람이 대피소의 문을 나섰다.
“토비오쨩, 대피구역 3 주변 세 마리랑 이 위의 네 마리. 내가 유인할 테니까, …없애버려.”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 뒷모습과 함께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과연 코다마 씨가 연속 철야를 한 만큼 아름다웠다.
9. 욕심
"카게야마 군, 잘 지냈나요?"
센다이 CIAS지부장 야마모토 쿠니히로는 카게야마가 시뮬레이션 F-13의 러닝타임 신기록을 25분이나 앞당겨 갈아치웠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그래도 인상 좋아 보이는 얼굴을 아주 활짝 피워내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것 참, 오이카와 군이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그 말끝에 실린 즐거움과 흥미로움이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카게야마에게도 빤히 보였다. 내가 러닝타임 신기록을 세웠다는 게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할 일인가? …그럴 리가. 그쪽이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듯이 멀뚱히 앉아서 야마모토가 앉은 쪽을 노려보는 열도 유일의 트리플 S급 센티넬에게 야마모토는 냉장해 둔 스포츠 드링크를 꺼내어 주었다. '그애'가 카게야마 군이 돌아오면 주라고 맡겨 놓고 갔어요. 그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야마모토에게 음료수 통을 건네받으며 카게야마는 그녀가 지부장과 꽤 가까운 사이로 보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제서야 약간 누그러진 공기에 야마모토는 속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어째 그애의 센티넬들은 다 이모양인지 모르겠다. 야마모토는 그새 칼칼해진 목구멍 너머로 한 차례 침을 삼켜낸 다음, 카게야마에게 독대의 용건을 전했다.
"…그래서, 꼭 카게야마 군에게 시뮬레이션 프로젝트 T의 알파테스트를 부탁하고 싶어요."
카게야마는 이제 대 크리쳐 섬멸전 시뮬레이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 매칭이 끝나기 전에는 실전에 투입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이제 곧 봄고 예선전도 시작될 거고 연습 시합도 줄줄이 잡혀 있는데 센터의 일로 배구 쪽의 연습시간을 잡아먹히는 게 이토록 아까울 수가 없었다.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담으려던 카게야마는 이어지는 야마모토의 말에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시뮬레이션 T는 2인 1조의 대민구호 및 크리쳐 섬멸전 시뮬레이션이라, 카게야마 군은 오이카와 군과 한 조가 되어 테스트를 진행하게 될 거예요."
카게야마 군은… 아마도 배울 게 아주 많겠지요?
…오이카와 선배와 함께, 라. 카게야마는 시뮬레이션 클리어 영상에서 보았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고작 환영일 뿐인 시가지와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깔끔하고 완벽하게 크리쳐를 섬멸하던 모습. 빨리 끝내고 토스 연습하러 갈 생각에 크리쳐와 함께 시가지도 때려부수던 자신과는 달랐다.
[토비오쨩. 너, 센티넬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저렇게 다 때려부술거면 네가 크리쳐랑 다를 게 뭐냔 말이야!]
스크린에 비친 카게야마의 클리어 영상을 한심하다는 듯 빼뚜름히 바라보는 오이카와에게 [크리쳐 섬멸전이라길래 섬멸했을 뿐인데요…?] 라고 대답했다가 두 배로 더 혼이 났었다. 어차피 오이카와 선배는 성격이 나쁘니까 뭐가 문제인지 곱게 가르쳐 줄 리가 없다. 그러니까.
"하겠습니다."
카게야마의 대답에 야마모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
센티넬 카게야마 토비오의 실험 및 연구를 위한 전담팀에서 치프를 맡고 있는 제 2 이형연구소 수석 연구원 마츠이 유카가 갑작스러운 카게야마의 질문에 부산히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저, 어떤 가이드를 보면 이 부근이 아픈데, 괜찮은건가요?”
“…어떤 가이드는 무슨 가이드인가요, 카게야마 군?”
마츠이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드물게도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사방팔방 돌리기 시작했다. 마츠이는 고장났나 싶을 정도로 뜸을 들이던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 토오루와 임시 페어를 이룬 그녀의 이름이 새어나오기 5초쯤 전부터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기꺼이 카게야마를 기다려 주었다.
“전에 ‘센티넬은 기본적으로 가이드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갖게 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처음에는 그…가이드라서 그런지 곁에 있으면 편해지고 안정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네. 아니, 안정되는 건 맞는데. 뭔가 이렇게…."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머릿속 단어 사전을 뒤지는 열도 유일의 트리플 S급 센티넬을 마주한 마츠이는 무심코 터질 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목구멍 너머로 쑤셔넣고 평상시와 같은 옅은 미소를 유지했다. 사춘기의 남학생은 델리케이트한 존재니까 상처 입히면 곤란하다.
“카게야마 군. 그 흉부의 통증 말인데요, 특정 가이드와 함께 있을 때 늘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특정한 상황에서만 그러는 건가요?”
마츠이 유카의 질문에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왼쪽 위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선배. 왜, 들어오신 겁니까?]
[너,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무라쨩? 야마모토 씨?]
가이드 투입 안내와 동시에 전력으로 대피소 4를 향한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막 링크되어 눈을 뜬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고작 시뮬레이션,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대피소 문 밖의 아비규환 사이를 산책하듯 걸어도 그녀에게는 상처 하나 남지 않는다. 괜찮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그녀는
바늘같이 얇은 유리조각 하나가 뺨에 스친 것만으로 상처입는다. 센티넬처럼 파장으로 몸을 감쌀 수도 없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지만 세상에 단 두 사람의 센티넬에게만은 절대로 평범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가 괜찮다고 해도 카게야마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선배?]
옆에 선 오이카와 선배의 팔이 움찔, 하고 굳었다. 아마 카게야마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의 팔이 최대한 펼쳐졌지만 건장한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을 한번에 품안에 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망설임 없이 뻗어온 팔이 등허리께에 와 닿더니 토닥토닥 리듬을 타자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살라 먹던 광폭한 불길이 얌전히 가라앉았다.
[얼른 끝내고, 저녁연습 하러 가자.]
[넵!]
[오이카와 씨는 집에 갈 건데?]
이어지는 그녀와 오이카와의 실랑이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가슴 한쪽에 통증을 느끼고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다. 파장은 더 없이 안정적이고, 선배는 안전하다. 오이카와 선배도 있으니 테스트는 무리 없이 끝날 거다. ...괜찮은 게 맞는데.
이상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
"…카게야마 군?"
"죄송합니다.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운동부다운 예의바른 인사를 남긴 카게야마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마츠이 유카는 그 동그란 뒤통수가 사라진 문가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10. 경고
[…링크 카운트다운. 시뮬레이터와 플레이어의 연결을 해제합니다.]
줄어드는 숫자를 따라 세며 오이카와 토오루는 눈을 감았다. 방금 그 악명높은 대 크리쳐 섬멸전 시뮬레이션 F-13의 개인 클리어타임을 30분대로 단축했음에도 만족하기는 커녕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 모니터룸에서 화면을 바라보던 F-13의 설계자이자 치프 엔지니어인 무라카타 키요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오이카와의 나쁜 버릇이 도졌군.’
마음이 복잡할수록 몸을 혹사시키는 버릇. 무라카타는 막 1연에서 승진해 치프 엔지니어가 되어 온 자신을 만나자마자 지금보다 한 뼘은 더 작았던 오이카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S랭크가 될 수 있을 만한 훈련 도구를 만들어 줘.]
맹랑한 꼬마가 아닌가, 생각했다.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2연의 몬스터. 센티넬 살해자.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높인 학계의 진귀한 연구대상. 말없이 오이카와 쪽을 바라보고 있자, 관찰하듯 무라카타를 마주 바라보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사르르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기다릴 테니까, 무라쨩.]
이상할 정도로 뒷면이 없는 미소였다. 그 웃음짓는 얼굴만 놓고 보면 또래의 중학생들과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2연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오이카와의 시뮬레이터 사용 기록을 본 무라카타는 전산 오류를 의심했다. 모든 시뮬레이션의 가동 횟수가 터무니없이 많았다. 센터의 권장치는 오래 전에 넘었고 생체 반응의 한계까지 몰아간 흔적이 가득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보통의 청소년이었다면 심각한 아동 학대로 2연이 열두 번은 신고당했을 터였다.
기록은 오이카와가 랭크업을 한 시기를 중심으로 3개월 정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어.’
무라카타는 그날부터 새로운 시뮬레이션의 설계를 시작했다. 어중간한 능력으로는 실행조차 어려울 정도로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시뮬레이션의 번호는 13번. 무라카타는 이 시뮬레이션의 테스터로 오이카와를 지명했고, 그날부터 오이카와와 F-13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오이카와를 노리고 만들었던 시뮬레이션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무라카타는 난이도 조정을 위한 정밀한 테스트를 핑계 삼아 오이카와에게 주어졌던 현장의 일을 모두 물렸고, 오이카와는 임시 가이드 몰래 이 테스트를 진행하느라(센터의 일로 무리해서 학교의 일이나 배구부 활동에 지장이 가게 되면 굉장히 화를 낸다고 했다) 비밀스럽게 센터를 드나들었다. 무라카타도 덩달아 보안 유지니 기밀 작전이니 하는 변명을 대며 오이카와의 행방을 묻는 그녀에게 여러 번 거짓말을 하곤 했었다.
그 덕택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S급 센티넬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첫 번째 정식 기록 측정에서 한 번 실패하고 러닝타임 150분으로 클리어했던 시뮬레이션을 30분 대에 주파하는 여유를 부릴 줄 알게 되었지. 무라카타 키요시는 자신이 곱게 키운 몬스터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무라쨩."
"고생했어, 오이카와."
"……."
오이카와는 대답 대신 무라카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맑은 홍차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무라카타를 옭아맬 듯 응시했다.
"시뮬레이션 T는, 누구를 위한 거야?"
"……?"
"안 되지, 무라쨩까지 그러면."
나른하게 가늘어진 눈매로도 숨길 수 없는 붉은 빛이 향기처럼 흘러나왔다. 무라카타는 의자째로 못박힌 사람과 같이 호흡하기 시작했다.
"두 번은 없을 테니까. 지부장에게 전해 줘요."
"오이카와…."
"그애와 나를 토비오 따위에게 엮을 생각 하지 말라고."
부탁이야. 무라쨩에게까지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 알았지? 라고 말하듯 오이카와가 생긋 웃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옭아매였던 호흡이 돌아온 무라카타가 거친 호흡과 함께 기침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표정을 지운 채 모니터룸의 문을 열었다가, 그 앞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고 묘한 표정을 했다.
"나이스 타이밍이야,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
전혀 나이스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그것을 지적하면 안될 것 같다는 정도의 눈치는 키운 카게야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이 와중에도 인사는 빼놓지 않는 귀염성 없는 후배를 스쳐 지나며 속삭였다.
"…토비오쨩, 너무 욕심부리지 마."
이제서야 겨우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토비오쨩이 자꾸 그렇게 그애를 탐내면, 나도 마음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없잖아? 오이카와는 크리쳐들이 가득하던 시뮬레이션 T 프로젝트 테스트를 떠올렸다. 그녀가 테스트에 참가했다는 안내를 듣자마자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피구역 4번을 향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토비오를. 오이카와가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말꼬리를 잡자 아쉬움 가득해지던 그 표정을.
본인이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상관 없다. 가이드인 그녀만이라면,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 오이카와는 웃었다. 카게야마의 표정 하나를 본 것 만으로도 이렇게 날뛸 거면서. 잘도 너그러운 척 고민을 했다. 그냥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
만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오이카와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중인 카게야마를 향해 오이카와는 다시 말했다.
"욕심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토비오쨩."
왜냐하면, 이 오이카와 씨는 절대로 토비오쨩과 그애를 나누어 가질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마."
"…!!!"
카게야마는 거의 반사적으로 오이카와의 말에 묻어난 적의에 반응했다. 충분히 발화의 의도를 의심해볼만한 상황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카게야마는 수년간 오이카와의 이유없는 적의를 받아왔기에 이번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 오늘 기분이 좋지 않으신것 같습니다. 조금 쉬시는게 어떻겠습니까?"
"토비오쨩, 듣고 있어? 지금 오이카와 씨 경고했으니까!"
"…? 무리한 시뮬레이터 사용은 센터의 권장사항이 아닙니다."
"아아악 진짜!!"
미처 닫히지 못한 모니터룸의 문 틈새로 지나치게 또렷이 새어나오는 대화를 들으며 호흡을 가라앉히던 무라카타 키요시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비명소리에 겨우 사그라들었던 기침을 다시 시작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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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주제별로 보니까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드림란에 따로 정리.
...좋은 전력 주제가 나오면 이어집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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