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우시지마 와카토시, 사쿠사 키요오미 드림
대화가 필요해
사쿠사 키요오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목마름과도 비슷한 갈급함이 입안을 지나 가슴 속을 태우고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제 마음을 꺼내놓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니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웃어보이는 그녀에게서 와카토시 군의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지금까지 사쿠사가 고를 수 있었던 다른 선택지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갑작스러운 고백에 고장난 고양이처럼 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사쿠사의 입가에 작은 웃음 조각이 걸렸다. 앞으로도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계속, 더욱 혼란스러워 해 주었으면 한다.
와카토시 군에 대한 생각은 꿈 속에서도 하지 못하도록.
사쿠사는 굳게 닫혀 고요해진 객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 느긋한 걸음을 닮은 밤이 낮의 발자국을 쓸어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느때처럼 피트니스 센터에서 아침 운동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온 마키노 카오리는 어둑한 간접조명이 간간이 비치는 호텔 복도의 한쪽 구석, 자신의 방 앞에서 서성거리는 의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휴대전화를 꺼내어 세로로 꾸욱 쥐었다. 만약 불순한 목적을 가진 불청객이라면 당장 때려눕혀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소리 없이 다가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마키노는 놀라움과 허탈함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탄식하고 말았다.
“너, 도대체 얼굴이 이게 뭐야...?”
“...선배.”
“또 경기 영상 보다가 밤샌 거니? 아니면.... 무슨 일 있는 거야?”
이른 시간인데다, 운동으로 땀투성이가 되어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브이리그의 여신을 영접한 그녀가 힘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요….”
“일단 들어가자.”
마키노가 객실 문을 열고 그녀를 먼저 들여보냈다. 이제 조금 덜 잘록거리며 걷는 그녀를 소파에 앉힌 뒤, 머그컵에 따듯한 커피를 내려 온 마키노는 그 짧은 순간에 앉은 자세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잠들어 버린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지? 마키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침대에서 시트를 끌어와 그녀에게 덮어 주고, 혹시나 소리에 놀라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오전의 여자부 준결승전에 이어 쿠로와시키 남자부 준결승전을 앞둔 마루젠 아레나의 프레스석 한 귀퉁이에서, 잠에서 깨나자마자 최고 속도로 준비를 마친 다음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온 그녀가 인세에 현신한 여신 마키노 카오리 님을 향해 호객용 마네킹처럼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말을 외쳤다.
“선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자신이 마키노 선배의 객실 소파에 몸을 구기며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테이블 위에 간단한 먹을거리와 함께 놓여 있는 단정한 글씨체의 쪽지를 집어들었다.
[여자부 인터뷰가 있어서 먼저 출발할게. 식사 꼭 하고, 천천히 오렴.]
하늘 같은 선배의 사랑과 관심에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키노는 비교적 사람 같은 형상이 되어 돌아온 후배를 기꺼이 용서하는 댓가로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그래서, 뭣 때문에 밤새 눈도 못 붙인 거야?”
경기 영상 보느라 그런 거 아니지? 기대 가득한 선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그녀가 우물거렸다.
“아...그게, 그러니까요...”
우물쭈물 그간의 사건을 요약하여 일자별로 보고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마키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머나. 우시지마 선수는 이미 오래도록 그런 줄 알았지만, 사쿠사 선수까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니?”
“...모르겠어요.”
바로 그 지점을 생각하다 밤을 지새웠지만 결론이 날 리가 없다. 또다시 복잡다단한 얼굴이 되어 버린 귀여운 후배에게 마키노가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때?”
“네?”
이대로라면 진짜 곧 인터넷 사이트에 저주 신전 세워진다니까요? 인터넷 여론의 무서움에 치를 떠는 그녀를 향해 마키노가 웃어보였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스스로를 속이려 들지 말고, 지금 당장 어떤 결론을 내려고 하지도 말고. 잠시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러면 결국에는
“정말 네가 원하는 사람에게로 이끌어주게 될 테니까.”
마키노가 환하게 웃으며 축복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심호흡을 두 번 한 후에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오늘, 시합이 끝나면 만나러 가겠습니다.]
[일어났습니까.]
[...문자 확인 후 답장 바랍니다.]
문자에서도 뚝뚝한 성품들이 훤히 보이는 게 얼핏 한 사람이 보낸 것 같다. 지금 센터코트의 한쪽에서 스파이크와 리시브 연습으로 어깨를 데우는 중인 와카토시 군은 둘째치더라도, 사쿠사... 오미 군에게는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그녀는 머뭇머뭇 말을 고르며 휴대전화를 쥐고 있다가, 시합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리자 답장을 포기하고 휴대전화를 가방 속에 넣어 두었다. 일단, 우선은. 눈앞의 시합이 우선이다.
천 팔백여 명 관중의 이목이 센터 코트에 집중된 가운데 쿠로와시키 다섯째 날 남자부 제 1경기, 슈바이덴 애들러스와 DESEO 호니츠의 준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서버는 호니츠의 세터인 이이즈나 츠카사로, 고교 시절 사쿠사 키요오미, 코모리 모토야와 함께 이타치야마 고교 불패의 신화를 쌓아올린 선수였다. 강렬한 스파이크 서브와 스파이커를 우선시하는 편안한 토스로 안정적인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이다.
‘카게야마 군이나 미야 선수와는 다른 느낌의 좋은 세터지!’
오미 군이 옆에 있었다면 이이즈나 선수에 대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멋대로 아쉬워하며 경기에 집중했다.
끈질긴 듀스 추격전 끝에 첫 세트를 얻어낸 애들러스는 곧바로 같은 방식으로 2세트를 빼앗겼다. 힘의 낭비가 조금도 없는 팽팽한 균형이 코트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3세트 후반, 애들러스의 작은 거인 호시우미 코라이가 20점대를 선취한 호니츠를 추격하겠노라 선언했을 때였다.
“거기. 지난번에 이 몸을 막았던 녀석!”
호니츠의 미들블로커 카이 료세이를 손가락 하나로 불러세운 호시우미가 씨익 웃어보였다.
“어디 오늘도 힘내 봐라. 키 큰 꼬맹이.”
오늘은 너를 집중해서 뚫어 주도록 하지.
옆에서 이이즈나가 우리 스파이커에게 시비 걸지 말라고 하든 말든 곧은 눈길로 선언한 호시우미는 자신의 말을 지켜, 연속 5득점의 파란을 일으키며 3세트를 가져왔다. 애들러스는 그 여세를 몰아 4세트에도 승기를 놓지 않았다. 4세트 결과 25대 20, 세트 스코어 3대 1로 슈바이덴 애들러스는 왕자의 품격을 지키며 5년 연속 쿠로와시키 결승에 진출했다.
***
준결승전의 수훈선수는 누가 뭐라 해도 호시우미 선수임에 틀림이 없었다. 카게야마 군의 토스가 오면 오는대로, 오지 않는다면 오게 만들어서 받아침으로써 호니츠 블록을 교란시키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키노 선배가 호시우미 선수와의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블랙 자칼과 워리어즈의 준결승 제2 경기를 기다리며 시합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노트를 채워나가던 그녀는 노트 위로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와카토시 군.”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위에 운동복 상의를 걸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광고판 안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합 끝나면 찾아온다더니 이렇게 일직선으로 올 줄은 몰랐다. 눈만 마주치면 일직선으로 다가오던 오미 군을 떠올린 그녀가 무심코 웃었다. 그녀를 혼란에 빠뜨리는 두 사람, 이런 점까지 비슷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결승 진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 대화 연습도 끝났는데 할 말이 더 있나요?”
숨돌릴 틈도 없이 묻는 그녀에게 우시지마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쿠로와시키가 끝난 뒤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여름 지나면 곧 시즌이잖아요.”
만나기 싫어도 매 경기 때마다 만나야 할 텐데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그녀의 대답에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거 참, 오래 살다 보니 와카토시 군이 속 터져 하는 모습을 다 보네... 그녀는 진귀한 구경을 남 일 보듯 넘김으로써 마지막으로 우시지마의 입을 틀어막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사이, 우시지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다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숨에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하고 싶습니다.”
“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이쪽을 향해 있는 시선들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우시지마의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광고판을 밀어버리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우시지마 선수!!!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리고 그대로 192cm의 거구를 질질 끌며 깨금발로 경기장 밖까지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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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편 안쪽으로 끝내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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