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우시지마 와카토시, 사쿠사 키요오미 드림


 

대화가 필요해

 



 



[유탄에서 시작된 사랑...결실 맺나]

[쿠로와시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우시지마 와카토시(23) 선수]


“...그런 거 아니라던 분 어디 가셨나?”

“선배 제발! 그 이상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본인도 몰랐던 우시지마 와카토시와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넘실거리는 인터넷 창을 닫아버리고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지난번 일은 방송사고라고 넘길 수나 있었지... 그녀는 별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까지 전화와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버리고 호텔 방에 틀어박혔다. 간단히 요기가 될 만한 것들과 와인까지 챙겨 와 주신 마키노 선배가 그야말로 달빛의 여신 같은 자태로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 사이,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겨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선배. 맥주는 없어요?”

“너 아직 덜 혼났구나?”


칵테일 파티 도중에 잠시 빠져나온 거라,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는 말과 함께 마키노는 잠시 그녀의 넋두리를 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했는데에에!!”

“저런...”

“그런 눈깔로 보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냐고요!”

“...눈깔...?”

“연습을 하면 뭘 해! 아... 또 열받네. 우시와카, 선배랑 인터뷰 할 때는 멀쩡하게 말만 잘 했으면서!”

“...어머. 그러고 보니 그랬네?”

“그것 보세요! 꼭 그렇게 제가 부족한 걸 티 냈어야 했냐구요!”

‘아니, 그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화 연습이고 뭐고... 사람을 또 이렇게 바보로 만들고!”


‘와인은 기분이 안 난다’고 하더니, 그녀는 와인을 포도주스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키며 들입다 우시지마 욕을 해댔다. 온갖 창의적인 나쁜 말 사이에 드문드문 ‘귀엽다고 생각한 거 취소다’, ‘친구부터 시작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아나운서 이미지를 이렇게 박살을 내는 친구가 어딨냐’는 말들이 섞여 나왔다.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구경하던 마키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다독였다.


“오늘은 고생 많았으니까, 푹 쉬자.”


그랜드 볼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을 나서는 마키노에게 그녀가 물었다.


“...선배.”

“응?”

“저, 얼굴 빨개진 거... 티 많이 났어요?”


서서히 닫혀가는 문을 잡고, 마키노가 눈부신 미소로 답했다.


“메이크업, 정말 잘 됐더라.”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망했다.

잠이 안 온다.

그녀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무 분하면 잠이 안 온다더니 그게 맞는 말인가보다. 사실 잠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안경에 모자까지 쓰고 동네 산책 나온 것 같은 편안한 차림으로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조금 바깥을 걷든가 뛰든가 하고 와야 잠이 올 것 같다. 어제 우시지마... 여튼 그 공원에라도 가 봐야지.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통과하던 그녀는 로비 입구에서 익숙한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사쿠사 선수!’


C대도 이 호텔이었지! 그녀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사쿠사를 부르려다가 멈칫하며 몸을 피했다.


‘맞다...오늘 애들러스한테 졌는데 말을 하고 싶겠어?’


조용히 피해서 가자. 그녀는 있는 대로 모자를 내려쓰고, 모르는 사람처럼 사쿠사를 스쳐 지나갔다.

사쿠사 키요오미는 시합 종료 후, 호텔 인근에 대여해 놓은 연습용 체육관에서 내일 시합을 위한 훈련을 계속했다. 연습 종료 후, 사쿠사는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다음 하루의 피로를 물로 씻어내고 나서야 자신이 연습장에 서포터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주의하군.’


불쾌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로비로 내려온 사쿠사가 막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자그마한 여자를 발견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검정색 볼캡을 야무지게 쓰고 있었지만 사쿠사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호텔에 묵고 있었나...?’


분명히 문이 열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아무 것도 못 본 사람처럼 볼캡을 더 꾸욱 눌러 쓰고 사쿠사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허어?’


한껏 심기가 불편해진 사쿠사가 빠르게 출입구의 유리문들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아무리 재게 걸음을 놀린다고 해도 길이의 차이가 있어, 그녀는 금세 사쿠사에게 따라잡혔다. 사쿠사 키요오미는 느긋하게 보폭을 맞추어 걸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피합니까.”


깜짝이야! 따라오는 줄은 몰랐는지, 그녀는 파드득 놀라며 사쿠사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안경 안에 동그란 눈이 더없이 동그래지는 모습에 사쿠사는 마스크 안쪽의 입술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말을 계속했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고 했는데, 내가 와카토시 군에게 져서?”

“...???”


이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심히 억울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사쿠사 선수를 피했는지도 모르고! 일부러 말도 안 걸었는데. 뭐라고?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쿠사 선수는, 이기든 지든 우리 편이라고 했잖아요!”


뭔 소리야 진짜... 시합 지고 온 최애한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녀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 씨근거리며 화를 냈다. 사쿠사 선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야마다씨(사쿠사 팬인 그녀의 스태프)한테 다 이를 거야! 사쿠사 본인을 앞에 두고 올바른 팬서비스에 대해 중얼거리는 그녀에게서 무르익은 과일 향과 함께 약한 알콜 냄새가 난다.


‘...또 마셨군.’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사쿠사가 무심코 피식 웃자, 그녀는 그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해 왔다.


“아, 웃음이 나옵니까 지금!”


어쩐지 웃을 때마다 그녀에게 혼나는 것 같다. 사쿠사는 ‘물론, 오늘 시합 내용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졌지만 잘 싸웠다! ...그리고, 내일 이기면 결승 갈 수 있어요! 애들러스는 결승에서 깨부수면 되지!’ 라고 외치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인터뷰를 부탁해도 될까요?”

“방송에 나오는 건 싫은데요.”

“오프 더 레코드로.”


비방용이라. 좋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산책 겸, 서포터를 가지러 연습용 체육관에 간다는 사쿠사를 따라 걸었다.


“...역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 멀쩡한데요?”

“......멀쩡?”

“...죄송함니다.”

 



***

 



사쿠사의 걸음으로는 얼마 걸리지 않을 연습장까지의 길은 그녀의 걸음으로는 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사쿠사는 아무런 내색 없이 걸음을 맞추며 그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 주었다. 


봄밤의, 간질거리는 온기를 담은 바람이 뺨을 스치자 그녀는 모자를 벗어들고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배구와 일상생활이었다가, 다시 배구로 돌아온 주제에서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손목 스트레칭은 언제 보여주실 거예요!”

“오늘도 했는데요.”

“프레스석에서는 안 보였잖아요. 제 눈앞에서 해주셔야지. 히나타 군은 코앞에서 봤다는데. 저는 사쿠사 선수의 관절 가동역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요!”


사쿠사는 툴툴거리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길이 쏟아지듯 향하는 곳에는 저렇게 작은데도 생활이 가능하구나, 싶은 그녀의 손이 있었다. 사쿠사는 그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자.”

“?????”

“만져 보든가.”


...만지라면 못 만질 줄 알아? 내가 만지고 나서 손 소독제 쓰고 그래라! 그녀는 눈앞에 다가온 절호의 기회를 낚아챘다. 우선, 손목을 잡아 보았다. 역시 한 손에 안 잡힌다. 우시지마 선수에 비해 한참 마른 것 같아 보여도, 신장은 같기 때문에 그녀와는 뼈대의 사이즈가 다르다. 


손목에서 내려온 그녀의 손가락이 사쿠사의 손가락을 쥐었다가 그대로 조심스럽게 손등 쪽으로 밀어 보았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아주 부드럽게 휘어지는 손가락에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다.


아니, 사람 손이 어떻게 이래...? 이게 돼?


놀란 그녀를 보며 사쿠사는 학생 시절 배구부 녀석들에게 보여주던 대로 손목을 안쪽으로 접어 보였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질문했다.


“사쿠사 선수... 혹시 어릴 때 식초 막 먹고 그랬어요?”


어이없는 질문에도 사쿠사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우메보시는 좋아했지만 식초는 안 먹었습니다.”


우메보시! 우메보시인가...! 큰 발견을 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 사쿠사는 가볍게 손목을 돌려 아직도 신기한 듯 사쿠사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올리며 말했다.


“...이제 가시죠.”


봄밤, 최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이런 걸 계를 탔다고 하나... 멍하니 생각하던 그녀는 상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일정한 간격의 진동에, 휴대전화를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꿈에서 깨어난 듯, 지면에서 살짝 떠 있는 것 같던 발끝이 땅 위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