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우시지마 와카토시, 사쿠사 키요오미 드림
대화가 필요해
망했다.
인생 최악의 실수다.
사쿠사 키요오미는 소파에 기대어 휴대전화를 든 자세 그대로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버렸다. 와카토시 군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자신의 팬이라던 사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한 인터뷰를 만들어내고, 술에 취해 전화해서는 천하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제 하인처럼 불러대는 사람. 그러면서도 사쿠사의 사인을 받아들고 햇살처럼 웃었던 사람.
와카토시 군의 휴대전화에서 통화 이력을 지워내는 그 짧은 순간, 사쿠사의 눈에 담긴 열한 자리의 숫자는 모임을 파하고 밤이 지나 아침이 되도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와카토시 군을 닮아서 그래...”
사쿠사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변명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사람과 와카토시 군이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해서, 그게 사쿠사 키요오미가 와카토시 군의 휴대전화에서 발견한 열한 자리 숫자를 계속해서 되뇌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사쿠사는 다른 이유를 생각했다. 그 사람이 술을 마셨으니까. 단정치 못한 목소리로 와카토시군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래. 컨디션 조절은 꼭 필요하니까. ...그런데.
‘술을 꽤 마신 것 같던데. 괜찮은가...?’
아직 남아있는 어제의 기억과 다시금 쌓인 여러 가지 생각이 수면이 모자란 머릿속에서 섞여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사쿠사는 무엇에 홀린 듯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었다. 문자 앱을 열고 상단에 열한 자리의 숫자를 채워 넣자 약간 마음이 놓였다. 잠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쿠사는 곧 몇 개의 문자를 두드려 넣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정확히 5초 후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딱딱하게 굳어서 문자를 보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니. 어디의 직장 상사인가.’
그보다 저렇게만 보내 놓으면 완전히 괴문자 아닌가? 그 사람은 내 번호를 모르잖아. 누군지 밝혀야 한다. 아니, 가능하다면 문자를 지워버리고 싶다.
아주 신선한 흑역사의 현장에서 괴문자 생산자로 남느냐 흑역사를 갱신하느냐로 고민하던 사쿠사는 결국 흑역사를 갱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쿠사 키요오미입니다.]
...안 그래도 수상한 문자가 한층 더 수상해졌다.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문자 확인 전이라면 발송을 취소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오전 여섯시 반. 사쿠사에게는 늦은 아침이지만 일반인인 그녀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휴대전화를 들여다 본 사쿠사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답장이 와 있었다.
[사쿠사 선수?]
[진짜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우시지마 선수가 가르쳐 주었나요?]
***
역시 꿈 아니었네! 그녀는 왜 사쿠사가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려다가, 어제 전화를 대신 받은 사쿠사에게 신이 나서 우시와카를 연호하고, 엉망진창인 목소리로 횡설수설한 끝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은 사쿠사에게 ‘웃어?’ 하고 시비를 털었던 기억을 끄집어낸 뒤 더 이상의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말짱합니다!]
그녀는 잔뜩 망설이며 ‘이 이상 어제의 이야기를 할 생각 마라. 최애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라는 마음을 담아 문자를 전송한 다음,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 놓고 최대한 침대를 멀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애써 무심한 척 들어 올린 휴대전화에는 사쿠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진짜 뭐지?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설마 그냥 안부 문자였던 거야? 사쿠사 선수가? 나한테? 이걸 팬으로서 계를 탔다고 해야 할지, 흑역사를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그녀가 일단 최애의 번호를 저장해야지. 하고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지난번 인터뷰는 감사했습니다.]
[쿠로와시키에서도 할 수 있는 만큼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자판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자, 그럼...일단 시프트를 바꿔 볼까. 그녀는 가방 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며 씨익, 웃었다.
사쿠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지만, 대번에 와카토시군에게서 번호를 받았냐는 말에는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다만 다행이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도 뭔가 마땅치 않은 느낌에 잠시 미간을 구기다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자판을 두드렸다.
답장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도착했다.
[사쿠사 선수의 경기라면 쉬는 날이라도 갈게요!]
스르르르, 기대어 있던 자세 그대로 소파에 미끄러져 누운 사쿠사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이게 뭐야...”
눈을 감으면, 어두운 가운데 멀리서 불길한 신호가 깜박이고 있다. 그저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을 뿐이라서 사쿠사 키요오미는 눈을 감은 채 그 신호를 바라보며 아직은 괜찮다고, 지금은 스스로 멈출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몇 번이고, 타이르듯이.
결국 그 신호가 스스로 빛을 잃어버릴 때까지.
***
검독수리배 전국 남녀 배구 선발 대회. 쿠로와시키, 라는 이름으로 익히 알려진 이 대회는 V-리그 1부 팀 전체와 2부 상위 팀, 대학 리그 상위 팀과 봄의 고교배구 1위 팀을 선발, 남녀 각 16개 팀이 모이는 대회이다. 개최지는 오사카이며, 개막일부터 3일간의 리그전을 치르고 리그 1,2위 팀끼리 토너먼트를 통해 검독수리깃발의 주인을 정하게 된다.
골든 위크의 5일간 치러지는 배구인들의 축제인 것이다.
그 개막전을 앞두고, 긴장감 가득한 회장의 프레스석에서 브이리거들의 여신이 그녀를 놀렸다.
“골든위크에는 쉬어 주어야 한다던 사람 어디 갔나?”
“무슨 말씀이세요! 배구인들의 축제 쿠로와시키! 반드시 인터뷰 해야지요!”
“모처럼 아레나석에서 편히 응원해도 되는데.”
“선배!”
그녀의 외침에도 마키노 선배의 웃음은 짙어지기만 했다.
“C대는 애들러스랑 같은 리그더라?”
그리고 그린 로켓이랑... 토카이였나? 이길 수 있겠어? 1부 리그 우승팀을? 어림도 없다는 선배의 말에 그녀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반드시 승리팀 인터뷰를 따내겠습니다...!”
“그건 선수들이 힘내서 이겨야 할 수 있는 거잖아.”
뭐, 어느 쪽이든 볼만하겠다. 그럼, 힘내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우아하게 뒤돌아서는 선배를 배웅하는 그녀의 뒤에서 자체 에코가 장착된 중저음이 들려왔다.
“취재로 오신 겁니까.”
“우시지마 선수!”
전화영어... 아니 대화 연습으로 종종 통화하다 보니 우시와카가 전처럼 얄밉지는 않아 보인다.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해 보이는 태산같은 덩치가 예전만큼 답답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개막전 A조 첫 시합은... 애들러스와 그린 로켓이었지. 그녀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우시지마 선수, 다 부숴버리세요! 파이팅!”
“네. 다 부수겠습니다.”
...파이팅.
그녀는 가만히 주먹을 쥐어 보이고 돌아서는 우시지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뭐야 진짜 왜 귀엽고 그래!?’
웃다가 눈물 맺힌 눈가를 닦으며 프레스석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녀의 시선이 체육관의 기둥 사이에 붙은 검은 그림자에 멈추었다.
새카만 운동복과 새카만 마스크. 안 그래도 큰 키를 더 커 보이게 만드는 마른 체형.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쿠사 선수!
히이익, 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던 사쿠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쿠사는 기둥에서 몸을 떼어낸 다음 느릿하게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분명 느리게 걷는 것 같은데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거리를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파일 홀더를 뒤적거렸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일직선으로 그녀의 바로 앞에 당도한 사쿠사가 친절하게 허리까지 숙여 가며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사쿠사 선수...”
우시지마 선수 경기 보러 오셨나봐요! 사쿠사 키요오미가 고교시절 전국 3대 에이스로 엮이기 전부터 우시지마 선수를 라이벌로 꼽아 왔다는 것을 기억해낸 그녀는 다 안다는 듯 말을 붙였다. 사쿠사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듯 눈을 굴리더니,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남는 자리 없습니까.”
예? 자리요? 사쿠사 선수 지금 예매 없이 들어왔어요? 선수는 관계자니까 들여보내 주나...? 설마 자리에도 안 앉고 아까처럼 한쪽 벽에 붙어서 두 시간 짜리 경기를 지켜볼 생각이었나?
‘내 최애에게 그런 고생을 시킬 순 없지.’
그녀는 사쿠사를 스탠드의 방송사 배정 좌석으로 안내했다. 그러고 나서 프레스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덩그러니 혼자 앉은 사쿠사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 앉으라거나 하는 말은 없었지만 왠지 최애 혼자 덩그러니 앉혀놓고 가기가 그래서 그녀는 슬그머니 사쿠사의 한 자리 옆좌석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사쿠사 선수는 이내 시선을 A코트에 고정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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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는데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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