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1학년들(日影月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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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권 이후의 네타 및 날조 주의, 약 스가카게 요소
3학기도, 연습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카라스노 배구부 부실. 덜컹거리는 바람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 넷이 모여들었다. 은은하게 미간에 불쾌함을 담은 츠키시마 케이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카게야마 토비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머지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 만만인 야마구치 타다시를 향해 여느 때 보다 진중한 얼굴의 히나타 쇼요가 무겁게 첫 말머리를 내려놓았다.
“자…. 모두 생각해 왔겠지?”
“왜 ‘약속한 물건은 가져왔겠지?’ 같은 말투로 말하는 거야.”
“그야 이거 엄청 중요한 일이잖아!”
“…….”
“일단 1번부터 생각해 보자.”
“왜?” “1번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아, 이게 엔노시타 선배가 말했던 루틴….’
야마구치 타다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동기들에게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주장은 아무래도 팀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야마구치잖아!”
히나타의 상쾌하기까지 한 즉답에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구치라면 히나타 멍청이나 츠키시마보다 낫지.”
“아, 나도 귤자식이나 왕님이 주장인 것보다는 절대로 네 쪽이니까.”
“너희들 ‘커피클럽’이냐! 죽어도 서로가 주장이 되는 꼴은 못 보는 거야?”
야마구치의 외침에 츠키시마가 딴청을 부리고, 바보 콤비는 안면에 물음표를 띄웠다.
“커피...”
“클럽?”
“야마구치. 저 둘은 그런 고차원적 견제를 할 수 있는 지능이 못 돼.”
커피 클럽이 뭔지는 몰라도 츠키시마의 도발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두 사람이 동시에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는 전개에 야마구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
[야마구치. 아마도 네가 될 것 같으니까, 준비해 둬.]
[네...?]
[내년의 주장 말이야.]
[제가요?]
야마구치 타다시는 구겨진 영수증 뭉치와 대조하며 하나하나 숫자를 적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고만고만한 숫자들이 끊임없이 적혀 내려가는 회계 장부를 지켜보던 엔노시타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짚었다. 아, 여기. 숫자 틀렸다. 네, 죄송합니다. 고칠게요. 부 활동비 정산을 돕다가 갑자기 차기 주장 낙점이라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기부자 명단의 주소를 체크하며 엔노시타가 말을 이었다.
[미안. 조금 당황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구치밖에 없어서 말이야…. 그래도 나처럼 허둥지둥하지는 않겠지, 야마구치라면.]
[어, 저기…엔노시타 선배. 주장은, 그래도 조금 더, 실력이라든가….]
[지금 그 발언은 내 실력이 3학년 중에서 출중하다는 칭찬이지?]
[…….]
[농담이야. 그렇게 사색이 되지는 말아 줄래?]
[죄송합니다….]
엔노시타가 씩 웃었다. 야마구치는 그 얼굴에서 사와무라 다이치, 너른 들판 같았던 그들의 선배를 읽었다. 어느새 주장의 얼굴을 한 엔노시타가 말했다.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아. 다이치 선배가 왜 한참 전부터 나한테 주장 자리를 맡겨 놓은 듯이 행동했었는지.]
그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였어. 그러니까, 야마구치도 그러려니 해 줘. 개성 강한 네 친구들의 고삐를 쥘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응? 어차피 우카이 코치님이나 다케다 선생님도 내년의 주장은 너로 정해졌다고 알고 계실 거고, 히나타들한테 물어봐도 괜히 속 터지게 “그럼 야마구치잖아?” “당연하지! 잘 됐네!” 정도로 얼버무려서 넘어가게 될 거야.
[네…?]
눈에 선하다는 듯 슬렁슬렁 말을 주워섬기던 엔노시타가 멍하니 얼이 빠져서 이쪽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운명의 후배를 향해 속삭였다.
다들 그렇게 주장이 되더라고.
[...그런 루틴인 거야.]
***
카라스노 고교 남자 배구부의 등번호는 최근 몇 년간 매우 느슨한 방법으로 정해지고 있었다. 신입생과 재학생을 합해도 벤치 멤버를 겨우 채울까 말까 하는 부원수로는 번호에 의미를 두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어서, 신입생은 입부 신청서 도착 순서대로 번호를 받고 그 순서대로 학년이 올라가면 새로 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 역할에 따른 번호를 받게 되는데 그래 봐야 주장 번호인 1번을 제외하면 선택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강호교의 경우에는 교사나 코치가 등번호 배정에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 막 다시 옛 명성을 찾은 미야기의 강호 카라스노 고교는 3학년들에게 본인들의 번호를 고르게 했다. 우카이 코치와 다케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내 준 기한은 일주일. 그 이야기를 하교길의 야마구치에게 가장 먼저 전해 들은 츠키시마 케이는 가만히 눈을 한 번 깜박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했으니까.”
“츳키, 벌써? 나 방금 말했는데?”
“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어.”
“몇 번? 1번이지? 츳키는 절대로 1번이 어울리는데!”
재차 묻는 시끄러운 야마구치를 입 다물게 하고, 츠키시마 케이는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즈마네 선배는 싫지 않으세요?]
[뭐가?]
[강렬한 재능이 쫓아오는 느낌.]
[그야 뭐….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
너랑 나는 포지션이나 역할 상 히나타랑 라이벌 관계에 가까우니까, 햇병아리 같던 히나타가 날마다 성장하는 걸 남들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겠지.
하지만 나는,
[히나타에게 질 생각은 전혀 없어.]
“…전적으로 동의해요. 선배.”
“응? 츳키?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니야. 한 박자 늦게 되묻는 야마구치에게 얼버무리며 츠키시마는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
“그러니까, 난 6번 정도로 하고 싶었다니까?”
“안 돼. 야마구치는 1번이야.”
차가울 정도로 단호한 말에 야마구치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히나타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럼 히나타는? 히나타는 몇 번이 하고 싶어?”
“이 녀석은 4번 아니냐.”
“‘에이스’, 라는 느낌이고. 좋아하잖아. 그런 거.”
카게야마와 츠키시마의 신랄한 공격에도 히나타는 후후후, 하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물론 대부분의 학교가 4번을 에이스의 번호로 지정해 두는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몸은 이제 4번 등번호 정도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란 말씀!”
“그래.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그릇(器)’을 ‘크다(太)’라고 썼었지. 너.”
“으와아아! 언제 적 일을 가지고 아직까지잇!”
얼굴이 벌개저셔 왈칵 화를 내던 히나타의 표정이 변했다. 야마구치의 노트에 써진 ‘4번’에 손끝을 갖다 댄 히나타가 어딘가 그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4번은 우리 슈퍼 리베로의 번호니까, 감히 받을 수 없지.”
“…뭐어….”
“그렇네.”
“…다 좋은데, 이제 슬슬 니시노야 선배를 다시 못 볼 사람이 된 것 처럼 말하는 거 그만둬줄래? 멀쩡히 살아 계신데다가 아직 졸업 전이거든?”
“지금 미야기에 안 계시잖아.”
“어디에 계신대? 졸업 전에는 국내 수행이라며.”
“어제 아사히 선배가 족타 제면 하는 니시노야 선배 사진 보내줬었어.”
카가와 현? 신출귀몰하네. 잠시 선배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로 왁자한 중에 히나타는 까까머리의 에이스 선배를 떠올렸다.
[히나타여, 카라스노를 잘 부탁한다. 1학년들은 딱 예전의 너희만큼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너희들이라면 반드시 우리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을 거야.]
나나 야마모토는 소위 ‘평범한’ 에이스라고 불리는 쪽이고, 어쩌면 앞으로도 너나 카게야마처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플레이는 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카라스노의 자랑스러운 에이스였다!]
그리고, 히나타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언제나와 같은 자신만만한 웃음과 함께 타나카의 풀 스윙이 히나타의 등짝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
“나는…!”
“아, 카게야마는 알아. 2번이지?”
모처럼 꺼낸 카게야마의 말이 바로 블로킹당했다. 어떻게…? 어안이 벙벙해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고 히나타가 배를 잡고 웃었다. 야마구치가 간간히 웃음을 섞어 가며 설명했다.
“정 세터는 2번으로 번호를 고정하자고 얘기가 나왔었거든.”
“물론 스가와라 선배의 번호였으니까 하고 싶다는 네 마음도 잘 알겠고.”
“그…, 내가….”
고장난 것처럼 뻐끔거리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카게야마의 입이 딱 다물렸다. 붉어진 귀 끝부터 천천히 목덜미까지 벌개지는 못볼 꼴을 츠키시마가 웬일로 관대하게 실눈을 뜨고 넘어가 주었다.
“그럼, 이제 각자 몇 번을 선택할지 정해 보자.”
야마구치가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겨 찢고 가로와 세로 한 번씩 접은 다음 찢어낸 네 장의 종이를 동기들에게 건넸다. 작은 노트 조각을 집어 든 네 사람이 각자 필기구를 꺼내 숫자를 적는 사각사각 소리가 조용해진 부실 안에서 간혹 덜컹이는 창문 소리와 함께 울렸다.
잠시 후.
“하나, 둘, 셋 하면 내는 거야. 하나, 둘….”
셋! 각자 내민 번호를 보고, 네 명의 검은 까마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거나 눈을 흘겼다.
“극적 타결이네.”
“애초에 타결될 부분도 없었던 거 아니야?”
“난 6번 하고 싶었다니까….”
“꿈 깨. 야마구치.”
창문 밖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왁자한 웃음소리가 더해졌다. 철제 계단이 삐걱이며 우당탕탕 오르는 소리에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소리가 끝나면 곧 부실의 문이 부저져라 소리를 내며 열리고…. 선배가, 그리고 선배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아주 평범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서서 다가오는 과거와 미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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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발분에서 애들 3학년때의 등번호 짤을 본 순간부터 두드리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저 번호들을 받으며 우리 애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오타쿠의 망상 풀전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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