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있어 : 사랑받고 싶은 것은 당신 뿐
카게야마 토비오 드림
드림 전력 60분 주제로 올렸던 글들입니다.
보통 운동부 남학생들은 인기가 많다. 애초에 시작점부터가 남들과는 다른 신체스펙을 갖춘 데다가, 거기에 약간 생긴게 멀끔하기만 하다면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여고생들의 '괜찮은 남학생 찾기 레이더'는 굉장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이미 새학기가 시작되고 2주 정도 후면 각 학년별, 운동부별 괜찮은 남학생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입학 이후 그 리스트에서 꽤 앞쪽을 차지했다.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든, 약간 차가운 느낌의 번듯한 생김새.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 고등학교 1학년에 이미 180cm를 넘긴 큰 키. 배구부 활동에 너무 열심인 나머지 피곤에 못이겨 수업시간에는 주로 졸지만 그 허술한 모습이 의외로 귀엽다는 중론이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카게야마와 말을 섞어 본다면 그가 차갑기는커녕 금방 화내는 다혈질인데다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단세포, 성적은 낙제가 우려되는 수준이고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해본 무해한 배구바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카게야마의 냉담해보이는 첫인상에 겁을 집어먹고는 다가가지 못한 채 약간의 거리를 두며 저들끼리 꺄악꺄악하고 울부짖기만 했다.
"이건 사기야. 소녀들의 순정을 돌려줘."
"??"
"...아냐. 하던 거 마저 해."
내가 말을 말지. 손톱에 거스러미 하나도 토스에 방해가 된다는 지론의 카게야마 선생은 남고생답지 않게 부활동용 가방에 손톱줄과 보호제, 핸드크림, 손톱깎이 등의 도구를 항시 휴대했다. 그러면서 '손톱관리? 그게 뭐죠? 먹는건가?' 하고 돌아다니는 히나타를 잡아채 앉혀놓고는 손톱깎이 등을 쥐어주곤 했다.
"...멍청아! 너도 미들 블로커라면 손톱 관리정도는 ...해!"
히나타는 울며 겨자먹기로 손톱을 강제 정리당하고는 간신히 풀려나서 리시브 연습을 하다가 오! 손톱에 부딫혀도 안 아파! 카게야마! 라고 놀라며 까르륵 웃어댔다. 이건 마치 애견 관리사와 한 마리 포메라니안 같네. 피식피식 웃던 나는 카게야마의 가방에서 살짝 튀어나온 복숭아 꽃잎 같은 색의 종이를 발견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은 고운 색의 저것은....오랜만이네. 과연, 시즌이다 이거지. 거침없이 손을 뻗어 편지를 집어 들자 카게야마는 이쪽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는데도 어깨를 움찔 떨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님. 오늘 방과 후, 신관 과학준비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연습이 끝나고라도 좋으니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배구부 연습은 저녁 일곱 시에 끝난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 이후의 나머지연습과 개인연습도 참여해서 최종 귀가 시간은 대략 저녁 아홉 시. 이 복숭아 양은 캄캄한 저녁 아홉시까지 과학준비실에서 기다릴 셈인가? 그보다, 지금 몇 시지?
체육관 한 켠에 걸린 시계를 보니 다섯시 사십오분. 복숭아 양이 부활동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도 족히 사십분은 기다렸을 시간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 카게야마를 불렀다.
"토비오?"
"...안 갈 겁니다."
"확실히 하고 와야지. 사나이가."
그렇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손톱관리용 도구를 챙겨넣으며 카게야마가 우물거렸다. 정말,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다. 나는 머리를 한 차례 뒤적거리다가 풀어버리고는 다시 묶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해."
카게야마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검다 못해 푸르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이쪽을 향한다.
"...좋아하는, 사람. 입니까."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머리 묶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깨닫지 못했다. "응. '배구해야 돼서 안 돼.' 라거나 '별로 너랑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뭐 이런식으로 말해서 소녀의 순정을 짓밟지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해. 그러면 '너는 괜찮은 여자이지만 나는 마음을 바친 다른 상대가 있으므로 너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가 되는거니까 여러모로 포장도 되고, 네 이미지도 그럭저럭 괜찮아 질거고."
모두가 행복한 엔딩이네. 실연당하는 복숭아양만 빼고. 조금 미안하긴 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 봐서 애가 이쁘면 그냥 확 잡아도 돼! 우리 부, 일단 연애금지는 아니니까! 알았지? 멋대로 속닥거리는 사이로 카게야마가 작게 말했다.
"...누구냐고, 물으면요?"
"어?"
"좋아하는 사람.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합니까?"
...보통 물어보나? 요즘 애들은 그럴수도 있겠다. 그래 궁금하기도 하겠지. 한참 생각하다가 답을 내렸다. 에이, 뭐 어때.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저 못미더운 배구바보에게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니까.
"나라고 말해."
"...선배라고 해도 됩니까?"
"응. 마음껏 팔아먹어."
"진짜,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됩니까?"
뭔가 약간 뉘앙스가 바뀐 느낌인데. 떨떠름하게 으응, 하고 대답한 나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아 체육관 문 밖으로 떠밀었다. 자 가라! 사나이 카게야마 토비오! 카라스노의 사령탑! 믿고 있으니까! 응? 카게야마는 살짝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보며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교사쪽으로 사라졌다. 묘하게 들떠보이는 뒷모습에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찮....은 거겟지?
그 후로 약 일주일 후, 카게야마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고백을 "선배가 '나를 좋아하라' 고 말해서 안 된다." 라는 말로 거절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한동안 카라스노 고교 여학생들은 배구부의 에이스(아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나를 좋아하라”고 명령한 ‘선배’가 누구인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계속했다. 소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내린 사람은 카라스노 배구부의 매니저 중 한 명인 시미즈 키요코로, 선뜻 말도 붙이기 힘든 냉미녀 매니저와 번듯하게 생겼지만 좀처럼 웃지 않아서 다가가기 힘든 운동부 에이스 소년의 조합이라 꽤 신빙성 있는 가설로 인정되었다.그녀들의 언어로는... 그림체가 비슷하다나 뭐라나.
“시미즈(선배) 라면 그렇게 말해도 할 말 없지!”
그리고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카라스노의 또 한 사람의 매니저이자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나를 좋아해라” 라고 명령한 장본인인 그녀는 진실을 은폐하는 데에는 한없이 무능한 카게야마의 입을 틀어막은 채 죽을 때 까지 입을 다물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이 학교에서 시미즈 키요코를 연적으로 둘 만큼 배짱 두둑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카게야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다만, ...키요코쨩에게는 사과해두자.
하지만 사랑놀음에 눈이 멀어버린 소녀들은 이룰 수 없는 열망에 마음을 태우려 하기 마련이다. 대소동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카게야마를 향한 대시는 봄고 2차 예선이 끝난 이후부터 한층 열의를 띄며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시미즈 키요코는 3학년으로 겨울이 지나면 곧 졸업을 하게 되기 때문에 카게야마와의 사이가 틀어져 이미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애초에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너, 언제부터 키요코쨩과의 불화설이 있었던 거야.”
“......네??”
자신을 두고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카게야마가 그녀의 물음에 눈만 깜박이며 물음표를 비눗방울처럼 띄워댔다. 애초에 이 녀석이 나쁘다. 사람의 말을 그렇게 멋대로 재생하는 법이 어디 있어! 다들 오해하잖아! 그녀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동글동글한 카게야마의 머리를 노려보는 동안, 카게야마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퍼뜩 고개를 들고선 “시미즈 선배가 뭔가 제게 화나셨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 표정이 하도 심각하고 고민스러워 보여서 그녀는 조금 힘을 주어 밀어보려고 했던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락사락하는 머릿결과 함께 동그란 뒤통수가 손바닥의 곡선에 맞도록 착 붙는 감촉이 생각보다도 좋아서, 그만 몇 번 더 쓰다듬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몹시도 어정쩡한 자세와 얼굴로 그녀의 손길을 받고는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농담이야, 농담. 키요코쨩, 아마도 화나지 않았으니까!”
연습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그녀가 시야를 벗어난 후에도, 카게야마는 좀처럼 간질간질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녀의 손이 닿았던 뒷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에게 조언을 얻은 다음부터 카게야마는 사물함이나 신발장, 또는 같은 반의 녀석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분홍빛 호출에는 성심성의껏 응대하고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가 부활동 시작 전에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제1체육관 뒤편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왔기에 걸음을 서둘러 1체육관 쪽을 향했다. 어서 이야기를 듣고 부활동을 하러 가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군을 좋아해. 혹시,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니?”
3학년의 선배와 사귀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의 여학생에게 카게야마의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선배와는 사귀지 않습니다.”
“저, 그럼...!”
“하지만.”
카게야마가 고개를 내려 눈앞의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에 두 눈 눈 질끈 감고 결정적인 대사를 외치려던 소녀가 갑작스러운 부정어에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카게야마와 시선이 맞았다.
‘이 사람도... 비슷하다.’
카게야마는 눈가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작은 웃음을 걸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카게야마의 표정을 본 여학생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더니 순식간에 만수위로 차올랐다. 그렁그렁 달려 있던 눈물이 깜박임 한 번에 볼 위로 떨어져 내렸다. 카게야마가 크게 당황하며 티슈를 찾아 내밀자 여학생이 눈가를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 군, 의외로 상냥하구나?”
선배가 고백해오는 사람은 울리지 말라고 했는데! 눈물과 웃음을 함께 닦아낸 여학생이 말간 얼굴로 아직도 당황한 표정 역력한 카게야마에게 질문했다.
“카게야마군의 ‘좋아해’, 는 어떤 ‘좋아해’ 야?”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면 괜찮은 쪽? 아니면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면 전혀 괜찮지 않은 쪽? 여학생이 무언가 한 꺼풀 벗은 듯한 개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금 카게야마 군의 표정을 보고 겨우 깨달았어. 나는, 카게야마 군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카게야마 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카게야마 군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거야.”
고백을 했는데,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 상태가 되어버린 카게야마를 보며 여학생이 또 다시 웃었다. 눈가는 발갛고 살짝 부어올랐지만, 깨끗하고 맑은 미소였다.
“카게야마 군은 어때? ...좋아하고 있다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 어느 쪽에 가까울까?”
여학생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선배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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