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전력 60분에 참여했던 조각글입니다.
오이카와+카게야마 드림
"너 말야... 오이카와씨도 토비오쨩만큼 바쁜 사람이라고?"
그런데 불러내놓고 왜 말을 안 해? 장난스럽고 약간은 높은 톤으로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면서 '아직 이런 건 조금 괴롭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눈 앞의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음료가 담긴 잔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시끄러워, 바보카와! 가 세번쯤 등장했을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오이카와의 시선이 자연히 그녀에게 머물렀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분하지만 멋있었고, 이와쨩과 셋이 어울리게 되면서부터는 지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와이즈미나 오이카와에게 여동생은 없지만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안쓰럽고, 때로는 기대어 쉬고 싶었고. 어쨌든 그녀가 웃고 있으면 좋았다. 소중했지만 '여자'로써는 아니었다고 정의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교 이후로 심심치 않게 여자친구들을 만나왔던 과거가 몹쓸 것이 되어버리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선배와 무슨 사이입니까?"
하지만 토비오의 한 마디가 몹시 거슬려 견딜 수 없었던 순간 오이카와는 깨달았다. 그녀를 정말 여동생처럼 생각했다고?
그럼 지금 당장 토비오의 멱살을 틀어잡고 싶어지는 이 마음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이카와는 죽일 듯 카게야마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어 고개를 들었다. 허탈한 한숨이 실소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의문으로 가득하던 카게야마의 눈이 가늘어졌고, 오이카와는 눈가에 얹어두었던 손을 내리며 카게야마를 향해 말했다.
"글쎄, 토비오쨩. ...무슨 사이일까?"
"...질문은 제가 드렸습니다."
"그럼, 토비오쨩은?"
"...?"
"토비오쨩은 그 애랑 무슨 관계인데?"
크윽, 하고 말문이 막힌 듯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더욱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1:1이야.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스스로의 실책을 알아채고 분함을 참지 못하는 카게야마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어차피 토비오쨩을 놀리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렇게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한 새로운 세트가 시작되었다.
"오이카와?"
응? 그녀의 부름에 기억의 저장고에서 끌려나온 의식이 깜박거리며 현실을 비추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녀를 공전축으로 둔 채 빙글빙글 돌며 인력의 증가를 기다렸다. 오이카와와 그녀가 고교 졸업을 하고 각자 대학에 진학하는 동안, 홀로 카라스노에 남은 카게야마는 아마 조금 속이 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지역의 여대에 진학하고 오이카와는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온 카게야마는 드물게도 웃으며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오이카와 선배! 합격 축하드립니다!"
"우와... 토비오쨩, 지금 굉장히 기분나쁜 얼굴로 좋아하고 있거든?"
"A대라면 대학리그 1,2위를 다투는 명문이지 않습니까!"
오이카와가 질색을 하고 '너 표정좀 어떻게 하라'고 말하거나 말거나 토비오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워했다. 자신만 의도와 생각이 불순했던건가 하고 오이카와는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했지만, 얼마 후 그녀에게서 "요즘 연합동아리에 가입했는데 동아리 술자리 모임에서 마시고 나면 어째서인지 매번 카게야마가 데리러 와 주고 있다"며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역시 토비오쨩 진짜 싫어!!!!!" 하고 폭발했다.
"...그래서 말이야. 토비오가 요즘 연락이 안 되는데. 바보카와,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결국 그녀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곁을 선택했다. 인공위성처럼 돌며 말하지 못했던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무서웠다. 이와쨩을 붙들고 꼴사납게 통곡했지만 그날 이와쨩은 "멍청카와!" 소리 한 번 없이 그저 괜찮다며 다독여주기만 했다. 괜히 서러워져서 두 배쯤 더 울었다.
"그 바보, 훈련 나가면 충전기 챙기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맛층한테 얘기해줄까? 토비오쨩 전화 좀 하라고?"
"아 정말? 그래줄래?"
오이카와의 말에 햇살이 비춘 듯 웃는 그녀가 낯선 여자처럼 보인다. 아. 안되겠다. 아직은 마주 웃어줄 수가 없다. "잠깐만, 실례." 하고 일어서는 오이카와에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응, 다녀와." 하고 웃음을 띄운 채로 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카페를 나가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며 화장실로 향했다.
***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선술집의 출입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카운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남자는 곧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찾는 듯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드물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 딱 맞춤한 트렌치 코트를 멋들어지게 걸친 미남의 시선이 가게 안쪽의 구석진 테이블, 한창 술모임이 무르익은 곳에서 멈추었다. 와그르르 둑이 터진 듯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 푹 가라앉아 미동도 없는 작은 뒤통수가 보인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마시지도 못할 술을!'
후우... 화내지 않는다. 화내지 말자. 화내지... 않는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오이카와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일행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까워질수록 오이카와의 무표정이 살랑거리는 미소로 변했다. 경쾌하기까지 한 구두굽 소리와 함께 그녀가 침몰해있는 테이블 앞에 선 오이카와가 자신들의 술자리에 갑자기 등장한 미남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넸다. 테이블 위의 빈 맥주병에게 석고대죄를 하는 그녀를 깨우던 옆 자리의 여자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 '토오루 쨩' 이세요?"
"...?...네."
약간 뜸을 들인 오이카와의 대답에 죽어있던 그녀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귀 끝까지 발개진 얼굴에 테이블에 눌렸는지 이마는 특히나 붉다. 도저히 초점이 맞지 않는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가, 눈 앞의 오이카와를 알아차리고는 멍뎅하던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을 매달았다.
"아, 토-루쨔아...!"
...아무리 취했어도 발음은 제대로 하자. 정신적으로 머리를 짚고 싶어진 오이카와가 그녀의 가방과 겉옷을 찾아 들며 주위에 물었다.
"저 녀석, 몇 잔이나 마셨나요?"
"세 잔...? 아니, 츠지우라의 잔까지 뺏었으니까 네 잔일까?"
"그럴 거예요."
치사량이네. 기어이 두 번째 한숨을 토해 낸 오이카와가 주위를 향해 인사했다. "이쪽의 주정뱅이 때문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술꾼은 제가 수거해갈 테니 걱정 마시고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미남의 깔끔한 인사에 대한 화답으로 흥이 오른 술자리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앉은 채로 졸던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과 박수에 놀라 깨고는 영문도 모르고 함께 박수를 쳤다. 그 꼴을 보던 오이카와는 마침내 세 번째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 가자. 일어나."
"으응."
그녀가 드물게도 오이카와 토오루의 말을 순순히 듣는 때다. 오이카와는 비척비척 일어나 테이블을 빠져나온 그녀를 잡아당겨 겉옷을 입히고, 꼭꼭 여밈을 해 준 후에 그녀의 어깨와 팔을 잡아 지지하고는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술자리에서는 그러고보니 오늘은 그 눈매 사나운 져지 소년이 아니네? 방금 그녀를 데려 간 토오루쨩은 누구야?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나마 상태가 온전했던 이들이 휴대전화 검색을 동원해서 방금까지 그녀가 휴대전화를 잡고 목놓아 부르던 '토오루쨩' 이 이번 전일본남자배구대표팀의 세터로 맹 활약중인 그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한 차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 애, 운동 했었댔나? 아니, 그런 말 없었잖아... 국가대표래... 나, 아까 그 사람 전일본배구팀 특집 버라이어티에서 본 것 같아! 잘 생겼다... 으아아, 아까워! 사인, 받아둘 걸!!!
계단에서 두 번쯤 다리가 풀리고 인도에서 한 번 넘어진 후, 오이카와는 네 번째 한숨과 함께 그녀를 들쳐업었다. "나 걸어갈 수 있어어어어-" 라는 그녀의 의견은 즉시 기각되었다.
"안 돼. 절대로 넘어져. 이미 넘어졌지만, 또 넘어진다구. 안그래도 못생긴 다리가 남아나지 않을 걸?"
안 못생겼거든. 제정신도 아니면서 비방에는 꼬박꼬박 응수해온다. 오이카와는 묻지 않았지만 대취한 그녀가 카게야마 대신에 그를 부른 이유는 알고 있다. 얼마 전 19세 이하 대표팀의 소집이 있었다. 6주 간의 훈련기간 동안, 카게야마는 한번도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배구에 빠져 사는 외곬인 그의 후배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예고 없이, 더구나 연락이 두절된 채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이었고, 카게야마는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같은 짐을 사용하는 마츠카와에게 연락을 부탁해 보겠다고 했지만, 하지 않았다. 어떠한 조그마한 틈을 오이카와는 만들고 싶었다. 자기 혐오에 가득찬 다섯번째 한숨 대신 오이카와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 무거워졌네."
오이카와의 말에 등 뒤의 그녀가 꿈틀거렸다. "내릴래!" 금방이라도 팔을 풀고 내릴 듯한 기세에 오이카와가 일부러 한 번 그녀를 미끄러뜨려 균형을 잃게 하고는 추슬렀다. 속절없이 오이카와의 목덜미를 부여잡은 그녀가 뭐라 중얼거리기 전에 오이카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야. 움직이면 더 무거워져. 가만히 있어."
딴에는 괜찮으니 그냥 있으라는 말이었지만, 또 접근방식이 틀려먹었다. 그녀는 오이카와의 말을 듣자마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토비오는?"
"카게야마는 한 번도 무겁다고 한 적 없단 말이야 바보카와아아아!"
"야, 여기서 토비오쨩이 왜 나와!"
그렇게 무거우면 업질 말든가아아 멍청카와아아아!! 나는 걸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에에에! 서러움이 복받쳐오는지 울음 반 말 반이다. 울음바다가 된 등 뒤를 달래며 오이카와는 어쩔 줄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고... 울지 마!
한참 눈물을 뺀 그녀를 어르고 달래 벤치에 앉혀 재우고, 오이카와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공주를 깨울 용사는 위 아래 검은 져지를 입은 채 생각보다도 빠르게 공원을 찾았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십니까! 선배는 괜찮습니까!"
"안녕 못해. 토비오, ...네가 아니면 집에 안 가겠다고 우기다가 잠들었으니까, ...깨워서 데려 가."
오이카와가 제 어깨에 얹힌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었다. 자면서도 괴롭히는 건 아는지 이마가 찌그러졌다. 카게야마는 어울리지 않게도 아주 조심스럽게, 깨울 생각이 없는 듯 그녀를 깨웠다. "저, 선배. 일어나세요. 집에 가야 합니다." 유리로 만든 꽃다발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조심스러운 시도 끝에, 카게야마는 그녀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등에 업었다. 그 과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워 오이카와는 짜증이 일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오이카와 선배....?"
그녀를 업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향해 인사하려는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마무리했다. 그제서야 오이카와는 자신이 그녀의 겉옷 자락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 뒤를 받친 카게야마의 손에 그녀의 가방을 들려 준 오이카와가 그만 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갔다.
가만히 가로등 빛을 따라 골목을 걷던 카게야마가 등 뒤를 향해 질문했다.
"...선배. 왜 자는 척을 하고 계셨습니까?"
"들켰네."
부정확한 발음도, 늘어지는 끝소리도 없었다. 내려 줄래? 그녀의 제안은 오이카와의 때와 같이 기각당했다.
"싫습니다. ...오랜만이니까요."
무겁지 않아? 큭큭거리며 묻는 그녀에게 카게야마는 "벤치 프레스보다는 가볍습니다." 라고 대답해서 또 다시 그녀를 웃겼다. 카게야마의 등에 뺨을 댄 채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해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왜 하필... 토비오였던 거야? 나는, 나는...!
싸늘한 밤 공기 대신 그녀의 뺨에 닿은 온기와, 안타까운 한숨처럼 속삭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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